항생제 공격을 내성으로 받아친 세균..인류는 승자가 될 수 있을까 [전문가의 세계 - 김응빈의 미생물 '수다' (15)]

김응빈 교수 2021. 2. 18.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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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실린과 슈퍼박테리아

[경향신문]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플레밍, ‘마법탄환’ 페니실린 발견
노르망디 작전 때 수많은 목숨 살려
항생제 핵심구조 타격 ‘세균의 반격’
과학자들 ‘메티실린’ 등으로 재응수
결국 내성 악순환 고리에 빠져들어

제1차 세계대전에는 그동안 발달한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다양한 신무기들이 일제히 등장했다. 전차를 필두로 전투기와 잠수함은 육·해·공 모두를 격렬하고 거대한 전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여기에 기관총과 수류탄 같은 신형 개인화기까지 가세해서 이전 전쟁에서는 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인명피해를 냈다. 4년 남짓한 전쟁 기간(1914년 7월28일~1918년 11월11일)에 900만명에 달하는 장병이 전사했고 2200만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이토록 참혹한 전쟁을 치르는 동안 프랑스 항구 도시 불로뉴에 세워진 군병원에서 부상 장병을 치료하던 영국 군의관,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1881~1955)은 의사로서 자괴감이 들었다. 다친 부위를 소독하고 수술을 잘해도 많은 부상자들이 속절없이 죽어나갔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직접 사인은 전상(戰傷)이 아니라 상처를 통해 들어간 세균 감염에 의한 패혈증이었다.

플레밍은 당시 사용하던 소독약이 깊은 상처 치료에는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부상자 치료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쪼개 그는 소독약이 세균뿐 아니라 백혈구에도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실험으로 입증하고, 그 결과를 1917년 논문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정작 상처 깊숙이 파고든 세균을 없애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콧물과 곰팡이, 그리고 세렌디피티

1918년, 전쟁이 끝나고 연구실로 돌아온 플레밍은 야전병원에서의 아픈 기억을 가슴에 묻고 병원균을 파괴할 수 있는 ‘마법탄환’을 찾는 데 몰두했다. 그는 생각나는 모든 물질을 실험 균주에 처리해 보았다. 심지어 감기로 콧물이 심했던 1922년 어느 날에는 그 콧물 한 방울마저도 실험에 동원했다. 배양접시에 콧물 떨어뜨리기 실험(?) 후 열흘가량이 지나고, 여느 때처럼 실험대를 정리하다가 플레밍은 깜짝 놀랐다. 콧물 주변에는 세균이 전혀 자라지 않았던 것이다.

곧이어 그는 눈물이나 침과 같은 체액에도 같은 물질이 들어있음을 발견하고, ‘분해하다’는 뜻을 지닌 접두사 ‘라이소(lyso)’와 ‘효소’의 영어 단어 ‘엔자임(enzyme)’ 뒷부분을 합쳐 이것을 ‘라이소자임(lysozyme)’이라고 불렀다. 이 효소는 인체 방어체계, 즉 면역의 한 구성 요소로서 세균의 세포벽을 파괴한다. 그러나 단백질이라는 특성상 안정성과 활성 조건이 제한적이어서 감염 치료에 사용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다시 6년이라는 각고의 시간이 지난 1928년, 이번에는 플레밍에게 행운의 곰팡이가 찾아왔다. 황색포도상구균을 키우던 배양접시에 푸른곰팡이가 오염되었는데, 그 곁에는 세균이 전무했다. 플레밍은 이 곰팡이가 세균을 죽이는 물질을 분비할 거라 직감했다. 우선 푸른곰팡이를 분리하여 조사한 결과, ‘페니실륨(Penicillium)’ 계통에 속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래서 이 살균 물질을 ‘페니실린(penicillin)’이라 명명했고, 나아가 이 화합물이 폐렴균을 비롯해 여러 병원균에 두루 효과가 있음을 알아냈다.

글로벌 한류스타 방탄소년단(BTS)의 노래 제목으로도 유명한 ‘세렌디피티(serendipity)’는 ‘우연히 중대한 발견을 하는 경우’를 뜻하는 영어 단어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우연은 길을 가다 돈을 줍는 것 같은 그런 요행을 말하는 게 아니다. 플레밍에게 행운이 찾아온 건 맞다. 중요한 것은 그 행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놓치지 않고 붙잡았다는 사실이다. 그가 마법탄환 탐색에 골몰해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플레밍 역시 이렇게 말했다. “준비된 사람만이 기회가 내미는 손길을 볼 수 있다.”

노벨상과 노르망디 상륙작전

페니실린 일반 구조와 베타-락탐 고리(빨간색)

1945년 노벨 생리의학상은 세 명의 과학자, 플레밍과 체인(Ernst Chain·1906~1979), 플로리(Howard Florey·1898~1968)가 공동 수상했다. 나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건너온 유대인 과학자 체인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1935년 옥스퍼드대학 병리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플로리를 만나 공동 연구를 했다. 이들은 페니실린 정제 및 농축 방법을 개발하고, 1940년에는 실험쥐를 대상으로 정제된 페니실린의 효능을 확증했다. 그러나 독일군의 공습까지 받는 영국에서는 원활하게 실험을 할 수가 없어서 미국으로 연구 무대를 옮기게 되었다.

미국 정부도 페니실린 연구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마침내 1942년부터 페니실린 대량 생산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944년 6월, 역사적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페니실린이 투입되어 부상당한 연합군 장병들을 세균 감염에서 보호했다. 그 덕분에 수많은 아들들이 살아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옥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총격전 속에 상륙 초기 3주 동안 연합군 측에서만 전사자가 9000명에 육박했고, 부상자는 5만명을 넘어섰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하지만, 만약 페니실린이 없었다면 두 수치가 바뀔 수도 있었다.

페니실린은 한때 천벌로 여졌던 매독 같은 전염병 치료에도 탁월한 효능을 보여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아울러 페니실린의 뒤를 이어 병원균을 무찌를 수 있는 여러 가지 항생제가 줄지어 발견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인류는 병원균과의 전쟁에서 곧 완승을 거둘 것이라는 기대감에 한껏 부풀었다. 인류의 승리를 마음껏 자축하며 해피엔딩으로 이야기를 마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럼 혹시 새드엔딩?

세균과의 공성전

공성전(攻城戰)이란 성을 빼앗기 위해 벌이는 싸움으로 고대나 중세의 전쟁을 다룬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단세포 생물인 세균에게 세포벽은 스스로를 보호하는 ‘성벽’인 셈이다. 세균 세포벽은 서로 다른 두 가지 벽돌로 만들어진다. 세균이 세포벽을 만드는 과정은 벽돌공이 성벽을 쌓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성벽 축조에는 두 부류의 벽돌공(효소)이 참여한다. 첫 번째 벽돌공은 두 개의 벽돌을 번갈아 배열하면서 벽돌 양쪽에 달려 있는 고리를 연결시키며 벽을 쌓아 나간다. 그러면 두 번째 벽돌공이 성벽의 층과 층 사이를 단단히 고정시킨다. 페니실린은 층간 결합 작업을 담당하는 벽돌공에 달라붙어 일을 못하게 한다. 다른 벽돌공은 일을 하므로 성벽은 계속 올라가지만, 층과 층 사이가 연결되지 않는다. 이렇게 부실 시공된 성벽은 세포 안에서 오는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무너진다. 세균 세포가 터지면서 세균이 사멸한다는 말이다.

승승장구하던 최초 항생제, 페니실린의 예봉을 꺾은 것은 ‘베타-락타마제’라고 하는 페니실린 분해효소였다. 황색포도상구균을 비롯해 여러 세균이 만드는 이 효소는 페니실린 구조의 핵심을 이루는 ‘베타-락탐 고리’를 파괴한다. 정확히 말하면, 페니실린은 한 가지 화합물이 아니라, 베타-락탐 고리를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수십 가지 천연 항생제를 아우르는 이름이다. 페니실린은 이 핵심 구조에 붙어 있는 곁가지에 따라 그 종류가 구분된다.

페니실린 분해효소는 바로 그 공통 핵심 구조를 타격해서 페니실린을 무력화시킨다. 말하자면, 페니실린이라는 여러 미사일을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요격하는 세균의 방어 무기인 셈이다. 인간은 ‘반합성 페니실린’을 개발해 신속하게 대응했다. ‘반합성(semisynthetic)’이란 말은 페니실린의 일부는 곰팡이가 만들고, 나머지 일부는 인공적으로 합성한다는 뜻이다. 참고로 항생제 이름이 ‘-실린(-cillin)’으로 끝나면 모두 페니실린 계열이다.

세균의 반격

뉴스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황색포도상구균은 여드름, 종기, 식중독, 폐렴 따위를 일으키는 골칫덩어리 세균이다. 페니실린의 활약으로 제압되는 듯하다 1950년대부터 저항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왕년의 마법탄환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과학자들은 ‘메티실린’이라는 반합성 항생제를 개발했다. 그러나 메티실린의 효력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메티실린이 개발되고 몇 년 만에 여기에 내성을 지닌 황색포도상구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들어 이런 내성 세균 감염 사례가 더욱 늘어나면서 결국 메티실린 생산이 중단되었다.

인류도 이에 굴하지 않고 ‘반코마이신’이라는 새로운 항생제로 응수했다. 안타깝지만 이 약발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1990년대 후반에 반코마이신에 약하게 내성을 보이는 황색포도상구균이 출현했고, 이윽고 2002년 미국에서 완전한 내성을 지닌 황색포도상구균 감염이 보고되었다.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고 만 것이다. 사실 플레밍은 이런 사태를 이미 예견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까지 남겼다.

“실험실에서 죽지 않을 정도의 페니실린 농도에 세균을 노출시킴으로써 이에 내성을 가지게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약국에 가서 누구나 페니실린을 살 수 있는 때가 올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약을 먹다 보면 똑같은 일이 우리 몸 안에서 일어날 수 있다. 페니실린 치료를 무분별하게 하는 사람은 페니실린 내성균 감염으로 인한 인명 피해에 대해 윤리적 책임이 있다. 나는 이런 비극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페니실린을 비롯한 항생제의 발견은 미생물학이 이룬 찬란한 업적 가운데서도 단연 백미(白眉)로 꼽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항생제 내성균들이 속속 출현하면서 그 빛이 가려지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내성균들에 맞서 싸울 탄환이 점점 소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균이 내성을 획득하는 속도가 새로운 항생제를 개발하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이다. 급기야 현재 사용할 수 있는 모든 항생제에 내성을 가지는 ‘슈퍼박테리아(superbacteria)’까지 등장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칫 잘못해 새드엔딩으로 향하지 않으려면, 병원성 미생물에 맞서는 우리의 전략과 자세를 되짚어보고 적절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알아보기로 한다.

▶김응빈 교수



1998년부터 연세대학교에서 미생물 연구와 교육을 해오면서 미생물의 이야기 미담(微談) 중에 미담(美談)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미생물 변호사’를 자처하며 흥미로운 미생물의 세계를 널리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연세대 입학처장과 생명시스템대학장 등을 역임했고, 한국환경생물학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SCI 논문 60여편을 발표했으며, 저서로는 <나는 미생물과 산다> <미생물에게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운다> <미생물이 플라톤을 만났을 때>(공저) 등이 있다. ‘수다’는 말이 많음과 수가 많음, 비잔틴 백과사전(Suda) 세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김응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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