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매에서 11억 원에 구입했다는 '호렵도' 그게 뭔데?
여기 18세기 후반에 그려진 걸로 추정되는 그림이 있습니다. '호렵도'입니다. 단어가 좀 낯선데, 한 자 한 자 풀어보면 직관적입니다. 오랑캐 호(胡), 사냥할 렵(獵), 그림 도(圖). '오랑캐가 사냥을 하는 그림'이란 뜻으로, 청나라 황제가 사냥을 즐기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총 8폭의 비단 병풍을 하나의 화폭으로 사용해 채색했습니다.
18일부터 국립고궁박물관 궁중서화실서 이 호렵도의 실물을 감상할 수 있게 됐습니다. 문화재청이 국외소재문화재재단과 함께 지난해 미국 경매에서 11억 원에 구입해 우리나라로 들여온 겁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호렵도 중 예술적 완성도가 가장 높은 작품"이라는 평가가 나오는데요. 어떤 그림인지, 유심히 볼만한 점들을 한 폭씩 뜯어서 보겠습니다.
먼저 5폭부터 보실까요. 하얀 갈기가 달린 말 위에, 이번 호렵도의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청나라 황제 건륭제가 올라타 있습니다. 정병모 경주대 초빙교수는 "푸른색 가죽옷의 가슴과 어깨에 곤룡포처럼 섬세한 용이 그려져 있어 그가 황제임을 표시한다"고 분석했습니다. 매서운 눈빛이 인상적이죠. 그를 둘러싸고는 군사 훈련을 겸하여 가을 사냥을 하는 일행의 모습이 함께 묘사됐습니다. 화살통을 등에 맨 인물, 그리고 호랑이 가죽으로 덧옷을 입은 인물도 눈에 띕니다. 말에 탄 자세도 다양하네요.
3폭엔 화려한 가마를 타고 길을 나서는 우아한 황실 여인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사냥에 나선 황제 일행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정적인 분위기가 느껴지죠. 두툼한 겉옷과 솟아오른 머리 정수리 장식이 눈길을 끕니다.
본격적인 사냥 장면은 7~8폭에 걸쳐 등장합니다. 호랑이와 사슴을 향해 활을 겨누거나 세갈래 창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사냥꾼들의 모습이 역동적으로 묘사됐습니다.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생동감이 돋보입니다. 재밌는 부분은, 호랑이를 표현한 방식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몸은 호랑이인데 얼굴과 꼬리는 표범으로 그려졌습니다. 민화의 요소가 담겨있는 겁니다.
호렵도는 18세기 후반 조선에서 유행했습니다. 청의 문물이 대거 유입되면서 청나라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무비(武備·군사 시설이나 장비)를 강조한 정조의 군사 정책과 맞물려 왕실에서 제작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초 군사전략을 위한 참고용 자료로 제작됐다가 감상용으로 널리 퍼지게 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요. 오랑캐를 낮춰 부르는 '호(胡)'자까지 붙여가며 왜 청나라 황제가 사냥하는 그림을, 그것도 왕실에서 그리게 된 걸까요. 여기엔 청나라에 대한 조선의 이중적인 감정이 반영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을 연이어 겪으면서 청을 증오했지만, 선진문물을 향유하며 성장하고 있던 청을 배척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입니다. 정병모 교수는 "북학 정책 속에서 자존의식을 지키고자 한 정조 때 외래문화의 수용태도, 국방의 정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말했습니다.
이 작품이 언제 어떻게 미국으로 반출됐는 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다만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며 이화여대 교수를 지낸 캐슬린 제이 크레인 박사가 소장했다가 개인 소장자에게 넘어갔고, 지난해 9월 미국 크리스티 경매에 나왔다고 합니다. 크리스티가 처음에 경매 출품작을 공지할 때 단원 김홍도의 작품이라고 소개해 기대를 모았다고 하는데요. 전문가 감정 결과 김홍도 화풍을 본뜬 후대 화원의 작품이라는 결론이 났습니다.
웅장한 산수 표현과 정교한 인물표현으로 수준 높은 궁중화풍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이 작품. 조선시대 호렵도의 시작을 엿볼 수 있어 앞으로 더 폭넓은 연구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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