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뒤안길에서 찾아낸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얼굴

김예진 2021. 2. 18.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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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남: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
일제 머리위에 폭탄 투하 꿈꾼 권기옥
고문으로 한쪽 가슴 잃은 김마리아
혈서 쓰기 위해 손가락 자른 남자현..
사료와 빛바랜 사진에서 얼굴 찾아
상상을 더해 전신 채색 초상화 그려
80대 윤 화백 "100인의 초상 완성해낼 것"
박자혜(왼쪽), 김옥련. 학고재 제공
박자혜가 강렬한 시작을 알린다. 붉은 천으로 감싼 남편의 유골함, 마디마디 힘을 준 손가락, 검은 상복. 그의 눈빛은 깊은 슬픔 속에서도 지지 않겠다는 의지로 이글거린다. 그는 단재 신채호의 부인이자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에 위치한 학고재에서 올해 주요 기대작인 ‘윤석남: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역사를 뒤흔든 여성 독립운동가 14인의 초상’ 전시가 시작됐다. 윤 화백이 김이경 작가와 함께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찾아내고 연구했다. 사료 속에서 이야기를 찾고, 빛바랜 사진에서 그들의 얼굴을 찾았다. 윤 화백은 상상을 더해 그들을 그렸고, 김이경은 독자가 읽기 쉽게 일기 등의 형식으로 각색해 글을 썼다. 그렇게 완성된 그림과 글이 이번 전시에 소개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로 1m, 세로 2m 크기의 여성 독립운동가 14명의 전신 초상 채색화와 드로잉 작품들이 학고재 특유의 차분한 공간을 터뜨릴 듯한 기세로 가득 채워져 있다.
남자현(왼쪽부터), 김마리아, 권기옥, 박차정. 학고재 제공
공군의 중요성을 깨닫고 일왕의 머리 위에 폭탄을 터뜨릴 날을 고대했던 권기옥은 자신의 뜻과 달리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 따위의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것이 얼마나 불쾌했을까. 왠지 그 마음을 아는 듯, 윤 화백의 초상화 속 권기옥은 다른 어떤 초상화보다 유독 중성적이고 늠름하면서도 현대적으로 보인다.

일제의 고문으로 한쪽 가슴을 잃어 섶의 길이가 다른 저고리를 지어 입었던 김마리아는 뼛속에 고름이 생기는 메스토이병을 앓았다. 평소 고통으로 인한 비명과 신음이 집 밖까지 들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림 속 김마리아는 평화를 상징하는 손가락 포즈를 취하며 눈부시게 웃고 있다.

고공농성으로 당대에 ‘체공녀’라 불렸던 강주룡은 윤 화백 초상화 속에서도 여지없이 지붕 위에 올라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고, 독립운동 자금을 운반하기 위해 기차역에 앉아 있는 정정화는 한쪽 손을 감추고 조용히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 아마도 숨긴 손에 닿은 것이 바로 독립운동가들에게 전달될 자금일 것이리라 상상한다.
정정화(왼쪽), 김알렉산드라. 학고재 제공
혈서를 쓰기 위해 단지한 남자현의 잘린 손, 박진홍의 책을 든 손, 박차정의 총을 든 손, 정정화의 감춘 손, 권기옥의 비행장갑을 움켜쥔 손. 해방을 꿈꾼 이들의 다양한 경로, 수단, 도구까지, 윤석남의 초상화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선명한 색감은 이 역동성을 더욱 부각한다. 40세에 미술을 시작한 윤석남은 서양화가로 30년을 살고, 10년 전 동양화를 시작했다. 수묵담채의 은은함과 쨍한 색감이 주는 강렬함이 한 작품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윤석남만의 채색 초상화가 탄생했다. 전시장에서 만난 윤 화백은 “중간색보다 강렬한 원색이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맞는 것 같다”고 탐색하듯 말했다.

작품 속 주인공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매서운 눈매, 우뚝 선 콧대는 윤 화백이 동양화를 공부한 계기라고 밝힌 조선 후기 윤두서의 초상을 연상시킨다. 마침 그가 10년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윤두서의 ‘자화상’을 본 순간을 생생하게 설명했다.

“서양화 유화로 그림을 시작했고 산수화 같은 것을 보면 무시했어. 그런데 나라는 존재가 뭔지 생각도 않고 무시를 한 거야. 윤두서 초상을 보고 얼어붙었어. 그날로 ‘정말 나는 바보같이 살았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공부는 해야 해’라고 생각해서 서양화를 버리고 종이를 사고 붓을 샀지. 이 공부를 시작하고 나니 지금은 너무 행복해.”

이후 10년, 이번 전시를 두고 학고재 측은 “윤석남의 여성 채색초상화가 드디어 본궤도에 올랐음을 보여준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전시장은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제의 공간 같다가도, 동시에 14명의 영웅을 주인공으로 하는 판타지 공간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선명한 색채에 상상이 가미되고 손과 눈빛이 과장이라 할 만큼 부각된 모습이 만화처럼 다가와서일까. 그 경쾌함이 역사의 비극성, 현실의 절망도 잠시나마 잊게 해준다.

이번 전시는 시작일 뿐. 윤 화백은 앞으로 여성독립운동가 초상 100명을 채우겠다고 한다. 장대한 프로젝트의 출발선에 선 82세의 그는 정정한 모습으로 따지며 역설했고, 성찰하며 수정했다. 남편이 납북된 뒤 고초를 겪은 정정화 초상 앞에서 그는 “독립운동을 하시고도 해방된 조국에서 감옥소에 갔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라고 물었다. 자신을 따라다니는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라는 수식어를 두고는, 모든 집단에 가족주의적 비유를 사용하는 관습을 거부하자고 제안했다. 전시장에 함께한 김현주 추계예술대 교수가 그 뜻을 대변하려는 듯 “대모나 어머니 대신, 지침석으로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윤 화백은 이번 전시와 함께 출간된 동명의 책 서문에서 험난한 시대에 몰입하며 겪은 괴로움을 고백했다. ‘작업하는 동안, 100년 전 여성들의 투쟁사가 나를 무겁게 눌러 괴로웠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들의 정신에 의지해 꿋꿋이 버텼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전시를 봐야 하는 이유 역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마음을 의지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작품을 설명하면서 “나라면”, “나였다면”이라는 말도 여러번 썼다. 손가락을 세번 자른 남자현 초상 앞에서 “싸우다 총에 맞아 죽기를 각오할 순 있어도, 내가 내 손가락을 스스로 자를 수 있을까. 나라면 못할 것 같다”라거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초상 앞에서 “그때는 나도 그 뜻에 수긍했지 않았을까”라고도 했다.

그렇게 혼연일체가 됐기 때문일까. 전시의 절정인 설치작업 ‘붉은 방’을 지나 다다른 마지막 초상화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는 윤석남을 똑 닮았다. 1939년 만주 출생. 때도 장소도 범상치 않은 데서 온 윤석남은 이렇게 우리 곁에 나타나 14인의 초상화 옆 남은 한 자리를 채우고 15인의 꺾이지 않는 여성의 대열을 완성한다. 4월3일까지.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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