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시는 장산곶매 백기완 선생을 고개 들어 배웅합니다 [백기완 선생을 기리며 추모 릴레이 기고 ③]
[경향신문]
1974년 1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영구집권을 꾀하며 유신체제를 획책하던 삼엄한 시기, 칠흑같은 질곡의 판을 돌연 갈라치며 나선 ‘새뚝이’가 있었으니 바로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 선생이었다. 장준하와 백기완을 잡아들이려고 군사독재정권은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하였다.
그 후 유신의 압제가 계속되던 1977년 무렵, 극심한 탄압을 뚫고 백기완 선생의 책 한 권이 세상에 나온바, 책 제목이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였다. 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형식으로 쓰인 이 자그마한 책을 읽고 받은 감동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다. 아! 우리 민족에게도 대륙이 있었구나! 우리를 갈라놓은 분단의 높은 벽이 우리의 감수성마저 이렇게 왜소하게 만들었구나!
무엇보다 그 책에서 우리를 강타한 것은 황해도에 구전되어온 ‘장산곶매’ 옛이야기였다. 장산곶매 이야기는 황석영의 대하역사소설 <장길산> 첫머리에 소설 전체의 주제를 상징하는 프롤로그 형식으로 기록되어 이미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바 있는데, 비로소 날것 그대로 원전을 접한 감동은 소설과는 또 달랐다. 날짐승 중 으뜸인 매, 그중에서도 가장 으뜸 장수매인 장산곶매가 대륙으로 사냥을 떠나기 전날, 밤새 부리질을 하여 자기 둥지를 부순다는 이야기는 유신독재정권과의 한판 싸움을 위해 자신의 안락과 일상을 버려야만 하는 우리에게 결단의 시간을 재촉하며 가슴을 후비고 들어왔다.
그런데 정작 내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잠을 못 이룬 것은 그다음 이야기 때문이었다. 물 건너 큰 대륙에서 엄청나게 큰 날개를 가진 독수리가 쳐들어왔는데도 마을 사람들이 모르고 잠들어 있는 동안, 장산곶매 혼자서 밤새 그 독수리와 맞서 싸워 겨우 물리친 후 피투성이가 되어 벼랑 위 낙락장송에서 지친 몸을 쉬고 있을제, 어디서 피냄새를 맡은 구렁이가 나타나 나무를 감고 기어올라가 장산곶매를 공격하거날, 마을 사람들이 뒤늦게 알고 장산곶매더러 빨리 날아오르라고 소리를 지르며 꽹가리를 쳐댔으나, 웬일인지 날개만 퍼덕일 뿐 날아오르지 못하더니 하릴없이 구렁이에게 당하고 말았다는 이야기…. 알고보니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을 지켜줄 매라고 장산곶매 발목에 끈을 매어 표식을 해놓았는데 그만 그 끈이 나뭇가지에 걸려, 지친 장산곶매가 그걸 끊어내지 못해 날아오르지 못했던 것….
내가 밤새 뒤척였던 것은 그 우화에 내재한 은유 때문이었다. 분단과 동족상잔을 막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김구 선생이 그만 동족에 의해 피살된 것이 바로 그 운명의 끈이었듯, 그토록 피투성이가 되어 독재타도, 노동해방, 민족통일을 외쳤던 백기완 선생이 끝내 비상하지 못한 것 역시 그 질긴 운명의 끈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회한을 느끼게 된다.
백기완 선생은 통일꾼이자 혁명가이고 사상가이며, 시인이자 이야기꾼이었다. 그중에서도 선생의 진면목은 ‘민중적 이야기꾼’이라는 점에 있다. 이야기의 내용도 탁월하거니와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 또한 탁월하였기 때문이다. 강약, 완급, 고저, 냉온….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수법이 동원되어 사람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이야기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선생의 이야기 내용은 주로 민중적 전형성을 지닌 인물 또는 동물에 관한 소재들과 민중이 염원하는 이상향에 관한 주제들이었다. 영웅설화의 민중판이라고나 할까? 앞서 언급한 ‘장산곶매’ 이야기는 생사를 결단하고 싸움터에 나서는 전사, 의사, 열사의 전형상을 은유한 설화요, ‘이심이’ 이야기는 착하고 힘없는 민중이 힘을 합치면 무지막지한 지배계층의 폭력도 이겨낼 수 있다는 예언적 설화라 할 수 있다. 그런가하면 ‘골굿떼 이야기’는 고기에 이밥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새세상을 염원하는 민중의 꿈을 대변한 설화일 터이며, ‘찬우물 이야기’는 아무리 마셔도 마르지 않고 샘이 솟는 땅, 생명이 용솟음치고 평화가 넘치는 그런 이상향을 그린 설화이다.
이뿐만 아니라 질곡의 늪에 빠진 세상에 샛별처럼 나타나 현상 타파의 계기를 일구는 전형적 인물 ‘새뚝이’, 자기를 옥죄고 있던 쇠사슬을 끊고 스스로 해방을 일구는 사내 ‘쇠뿔이’, 부당한 상대에게 고개 숙이지 않고 목을 뻣뻣이 세워 앞만 보고 가는 사내 ‘곧은목지’ 등은 민중적 전형성을 지닌 대표적 인물들로,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 카뮈의 시시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보다 훨씬 더 우렁차고 역동적이다.
백기완 선생은 이야기꾼만이 아닌 체험적 실천가였다. 그 자신이 생사를 결단한 장산곶매였고, 그 자신이 민중과 함께 싸운 이심이였고, 그 자신이 현상을 타개해나간 새뚝이요 쇠뿔이요, 절대 불의에 굴하지 않은 곧은목지였다. 백기완 선생은 부당한 압제로 인해 깨져나간 민중의 삶과 고통에 분노하고 그 삶과 꿈을 다시 불러 일으켜 세운 이야기꾼이었고, 동시에 자신의 이야기와 자신의 삶을 일치시킨 진정한 싸움꾼이었다.
우리 시대의 ‘장산곶매’ 백기완 선생이 그 질긴 운명의 끈을 풀고 저 세상으로 떠나셨다. 고개 들어 선생님을 배웅하고자 한다.
임진택 연출가·판소리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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