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담] "화이자·모더나의 계약 재촉은 사실..일방적 조건 탓에 늦어졌을 뿐"
코로나19 백신 국내 접종이 26일 시작된다. 우리보다 앞서 이미 약 80개국에서 백신 접종이 진행 중이다. 코로나 상황이 심각했던 미국, 영국 등이나 이스라엘처럼 접종률이 높은 나라에서는 뚜렷한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아직까지는 부작용도 심각한 정도는 아니어서 백신에 대한 기대를 높여 준다.
그렇다고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코로나 확산을 잠재우려면 일정 인구 이상의 접종이 필수인데 백신 공급 부족으로 집단면역 조기 달성이 가능할지 장담하기 어렵다. 개발된 백신의 효과가 한정적이거나 불투명한 변이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접종 효과가 반감될 수도 있다.
설 연휴가 지난 뒤 집단감염 사례가 잇따라 불거져 나오면서 연일 600명대 확진자를 기록하고 있다. 접촉 밀도가 높은 환경에서 방역 수칙 준수에 소홀했던 것이 화를 자초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무엇보다도 백신 접종에 대한 기대감만 앞서 방역 긴장이 느슨해지는 바람에 도리어 확산을 부추기는 사태는 피해야 한다.
코로나 국내 발생 이후 중앙사고수습본부장을 맡아 방역 대응을 일선에서 총괄 지휘했던 박능후 전 보건복지부 장관을 15일 경기대 수원캠퍼스 연구실에서 만나 향후 코로나 상황을 비롯해 지난해 의료계와 갈등, 재임 중 복지정책 등에 대해 들었다. 지난해 말 퇴임한 박 전 장관은 경기대 사회복지학과로 복귀해 오는 8월 정년퇴임 전 마지막 학기 강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3년 5개월 재임은 역대 복지부 장관 중 최장수 기록이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은.
“아무래도 코로나 발생 이후 집중했던 일련의 일들이 기억 난다. 취임 초기만 해도 신종 감염병 사태 대비는 2015년 메르스가 기준이었다. 음압병실 같은 것도 예상 소요 150병상 정도이던 것을 여유를 두고 200병상 정도로 챙기는 식이었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이런 대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코로나 초기만 해도 전문가들은 1급 감염병 상황에서 환자의 음압 격리가 기본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코로나 확산 속도가 빠르고 대구ㆍ경북 사태까지 터지자 음압병상 확충만으로는 감당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음압병상을 고집하는 의료계에만 의지해서는 해결 안 될 상황이었다. 다른 역량을 고려해야 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의료정책은 의학적 전문성과 사회의 수용성 등 사회과학적 지식을 종합해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처음 생활치료센터를 만들 때는 의료계는 물론이고 복지부 내부에서도 반대가 있었다. 토론하고 납득시켜 결국 한 발씩 나아갔다.”
-지난해 말 이임사에서 당시가 코로나 ‘데드 포인트’라고 했다. 그때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안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300, 400명 이상으로 확진자가 매일 나온다는 것은 포착하지 못한 감염자가 지역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는 의미다. 우선 그것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통제하느냐에 달렸다. 그리고 백신 접종이 잘 될 것인지가 또 다른 관건이다. 그에 더해 국민 개개인이 방역에 얼마나 적극 협조해주느냐가 중요하다.
백신 접종은 계획대로만 진행된다면 문제는 없을 것이다. 국민도 협조적이리라 본다. 다소간의 부작용은 불가피할 것이다. 지역사회 감염 차단은 지난 1년간 그랬던 것처럼 사태 추이를 보며 계속 창의적인 대책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다.”
-어떤 창의적인 방안 말인가.
“코로나 발병 후 1년 넘도록 상대적으로 고위험군인 노숙자나 외국인 노동자 등에서 대규모 감염이 없었다. 초기부터 이런 집단에 주목해 예방 대책을 실행하는 선제 조치를 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불법체류 노동자의 경우 증상이 있어도 선뜻 병원에 갈 형편이 못 된다. 그래서 질병과 관련해서 방문하면 어떤 것도 묻지 않는다고 계속 안내해 코로나 감염 숨기는 것을 예방했다. 노숙자는 정기 검사로 감염 확산을 막았다.
지난해 말 임시선별진료소 설치도 고민이 많았다. 더 많은 선별진료소를 만들어 무료로 운영하자니 담당 부서에서 ‘지금도 너무 힘들다’ ‘살려 달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래서 설치 숫자를 줄이고 군의관이나 자원 간호사로 인력을 보충해 운영에 나섰다. 확산 유형이 자꾸 변해가므로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선제적 차단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백신 접종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백신 확보가 늦었다는 비난이 여전하다. 백신 계약을 화이자, 모더나가 재촉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매와 공급이 늦은 것은 문제 아닌가.
“화이자, 모더나가 계약을 재촉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너무나 일방적이고 불리한 계약을 강요했다. 정부로서는 적어도 어느 정도 물량을, 언제 준다는 윤곽이라도 제시해야 계약하는 것인데, 접종 후 문제 생기면 전적으로 한국이 책임져야 한다, 물량도 자기들이 줄 수 있을 때 주겠다는 식이었다.
구매 계약과 공급이 우리보다 앞선 국가들 중에는 개발된 백신을 산 게 아니라 개발 단계에 이미 투자한 나라들이 있다. 처음 화이자, 모더나 백신 개발한다고 했을 때 일러야 2021년 후반에나 나올 거라 했는데 그게 당겨졌다. 3상까지 임상시험을 거쳐야 하는데 통상의 안전성 테스트를 완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쓰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불확실성이 있는데 개발비까지 투자할 것인가 고민이 있었다.
게다가 만약 해외에서 백신 개발하는데 투자하기 위해 돈 달라고 하면 국회나 재정 당국에서 선뜻 응하겠나. 코로나 사정이 급한 나라에서 과감히 투자를 한 것처럼 움직이기는 어려웠다. 대신 개발이 진행되는 단계에서 빨리 사기 위한 사전 접촉 등은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애초 제약사들이 제시한 조건과 실제 계약 내용이 달라졌나.
“처음에는 언제 준다는 날짜도 없던 것이 대략적인 시기라도 나왔다. 거듭 협상을 하면서 그 시기를 앞당긴다든지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만들어갔다. 웃돈을 주고 먼저 사들인 나라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내놓은 돈이 크지 않아서 공급 물량이나 시기가 불리해졌을 뿐이다. 퇴임 전날 새벽까지도 화이자 회장과 회의를 했다. 그때도 일단 사인부터 하라고 재촉하더라.”
-의사 집단 휴진 사태로 이어졌던 공공의대 설립 등 문제는 의료계와 소통이 부족했던 건 아닌가.
“공공의대를 만들겠다고 국회에서 논의한 것은 2018년부터다. 당정 협의와 시안 발표, 보건복지위원회 논의를 통해 어느 지역이라는 구체적인 그림까지 나왔다. 2년간 논의한 것을 지난해 구체화시킨 것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국회 상임위 차원의 공청회도 있었고, 그 자리에 대한의사협회 산하 연구소장까지 와서 의견 개진도 했다. 갑자기 나온 것도, 의료계와 소통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지방에 의사가 부족하니 이를 육성하고, 특정한 진료과들에서 의사가 배출되지 않으니 공공의료로 양성하자는 건데 반대할 이유가 없다. 의료계에서는 부족한 지방 의사의 보충을 위해 지방 의사에게 돈을 더 주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국가의 양성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반대해오던 의사들이 자기들 뜻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으니 소통 안했다는 식으로 반발한 것이다.”
-재임 중 복지 정책에서 자부할 만한 변화는 무엇인가.
“복지부는 2019년 5월부터 지난해 말까지 18개월 동안 매달 실시된 행정부처 정책수행 평가에서 한 번도 놓치지 않고 1등을 했다. 국민들에게 좋은 점수 받은 정책이 많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치매국가책임제로 시군구마다 치매안심센터를 만들어 예방, 치료는 물론이고 가족 쉼터까지 제공한 것은 처음으로 치매를 국가 정책으로 끌어들였다는 의미가 있다. 실효성 없는 정책이라고 비난하던 야당도 2018년 후반쯤 되니 더는 그런 소리 하지 않더라. 지역 주민의 반응이 좋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도 2, 3년 동안 무성했던 재정 악화라는 비판이 잦아들었다. 생활에 와 닿는 정책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오랜 숙원이던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나 공약인 아동수당 신설도 마찬가지다.”
-최근 이낙연 민주당 대표가 국회 연설에서 복지 수준을 최저기준에서 선진국 수준의 적정기준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했다. 그 방향에는 누구도 반대하지 않지만 문제는 재정 아닌가.
“복지란 것이 단순하지 않다. 우리나라 복지 재정의 70, 80%를 차지하는 것이 건강보험과 연금인데 두 가지 모두 국가의 일반재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보험 방식이다. 이를 통해 복지 수준을 높이는 것은 가입자의 보험료를 높이는 것으로 가능하다. 재정 문제와 정비례하는 건 아니다.
공공부조나 사회수당 방식의 복지를 확충하려면 당연히 국가의 일반 재원이 더 필요하고 그러려면 조세를 늘리는 것이 원칙이다. 지금은 과도기다. 과거에는 국가가 세금을 가져가면 삶과 무관한 데 쓴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었지만, 점점 내 삶에 유용하게 쓰인다는 경험이 늘고 있다. 코로나를 겪으며 건강보험을 다시 보게 되는 것도 그런 경우다.
복지를 확충하려면 보험료나 세금을 올리는 단계로 옮아갈 수밖에 없다. 과거처럼 그런 지출에 대한 불신이 크지도 않고 오래가지도 않을 것이다. 저부담 저복지인 현재의 수준을 중부담 중복지로 만들고, 다음 단계로 고부담 고복지로 가는 것이 순리다.”
-코로나 재난지원금을 두고 선별이냐 보편이냐 논쟁이 계속된다.
“보편, 선별은 양자 택일의 문제는 아니다. 더 어려운 사람에게 우선 주는 게 맞지만 때론 보편적으로 지급할 필요도 있다. 1차 보편 재난지원금을 받아 본 뒤 재난 지원에 대한 부정적 의식이 많이 줄었다. 써본 사람일수록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이 제대로 쓰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과거에는 일할 수 있는 사람에게 정부가 지원하는 것에 부정적인 여론이 많았지만 외환위기 중 은행원 대량 실직 사태를 보며 실직을 모두가 자신의 문제로 여기면서 빈곤정책의 근간이 된 기초생활보장법 제정이 가능했다. 한정된 재원으로 효율을 추구하려면 선별해야 하지만, 국민적 저항을 줄이려면 때로 보편도 필요하다. 정책이 지속 가능하려면 사회적인 지지가 있어야 한다.”
-인구 감소 시대가 시작됐다. 저출산은 오래전부터 큰 사회 문제로 인식됐지만 지금까지 대책이 그다지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정책 패러다임은 출산율 높이기보다 아이를 낳고 키우기 좋은 사회 환경 조성으로 바뀌었다. 새 정책이 효과를 보는 데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과거처럼 돈을 지원하면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건 유치한 발상이고 그래서 효과도 없었다. 결혼이나 출산은 개인적으로 큰 결단이고 삶의 방향과 환경이 바뀌는 것이다. 경제적 인센티브는 약간의 도움은 되지만 그런 결단을 이끌어낼 수는 없다.
재임 중 저출산 대책의 일환으로 인문학자 자문그룹을 만들었다. 이 문제를 철학적·인식론적으로 파헤쳐 달라고 했다. 쾌적하고 안락한 것만이 행복일까. 고통이나 어려움도 안고 갈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 인문학적인 방식으로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결혼이나 출산 같은 어려운 선택을 할 때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막막함도 해소되어야 할 것이다. 물질적인 지원만이 아니라 그런 부분까지 사회가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코로나 사태 수습이 당면 과제이지만 올해는 문재인 정부가 정책을 펼 수 있는 마지막 해다. 꼭 마무리하고 넘어가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
“복지 정책은 계속 진행 중인 사업이어서 완결이란 게 없다. 좀 더 속도를 내야 하는 것으로는 공공의료 강화를 꼽을 수 있겠다. 한창 꽃 피는 보건산업도 뿌리 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부 출범 당시 국정과제는 아니었지만 현장을 다녀보며 포착해서 새롭게 제시한 정책으로 지역사회 통합돌봄(커뮤니티 케어)이 있다. 뒤늦게 국정과제로 채택되었는데, 지역에서 노인이든 장애인이든 아동이든 필요한 돌봄을 시설에서가 아니라 재택 상태로 통합적으로 하자는 것이다. 시범사업이 진행 중인데 기본법이 만들어져 체계가 갖추어지면 좋겠다.”
김범수 논설위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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