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햇발] '경선 연기론', 꼼수로 민심을 얻을 수 없다 / 신승근
[아침햇발]
더불어민주당에서 난데없이 당헌 88조 개정 논란이 불거졌다. ‘선거일 전 180일’로 명시한 대선 후보 선출 규정을 ‘120일 전’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내년 3월이 대선이니 오는 9월까지 후보를 확정해야 하는데, 11월로 늦추려는 시도다. 너무 은밀해 첫 발화자가 누군지 알려지지 않았다. ‘친문재인계 의원’이라는 익명에 기대 “국민의힘은 120일 전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데 우리만 일찍 주자를 확정하면 공격에 노출된다”, “코로나19로 경선이 흥행할 수 없다”는 논리를 설파했다. 민주당이 대변인 논평 등을 통해 “당 차원에서 논의는 없다”고 선을 긋자, 친문 전재수 의원이 15일 처음 커밍아웃했다. 그는 “코로나19 때문에 경선이 실종됐다”며 “경선 일정을 조정하는 것이 국민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친문 핵심인 김종민 의원은 18일 “개인적으로 말씀하시는 분들 얘기는 들었다”면서도 “이재명 지사나 이낙연 대표 등 후보들이 ‘도저히 안 된다’고 하면 논의하기 어렵지 않겠냐”고 말했다.
대선 후보 선출 일정 조정은 전례가 없는 건 아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에 맞서야 했던 민주통합당은 무소속 안철수 후보의 입당 종용을 위해 대선 후보 확정을 ‘80일 전’으로 늦춘 바 있다. 문재인 후보의 선출이 유력한 상황이었지만 당헌 88조의 단서 규정 ‘다만, 상당한 사유가 있을 때는 당무위원회의 의결로 달리 정할 수 있다’는 조항을 활용했다. 당헌을 바꾸지 않더라도 후보 선출을 연기할 길은 이미 열려 있다. 그런데도 ‘당헌 개정론’에 군불을 때는 건 이재명 경기지사에 대한 의구심을 지우지 못한 이들이 그를 견제할 지렛대로 활용하는 측면이 강해 보인다.
일찍 후보가 정해지면 공격받는다는 건 아주 ‘영리한’ 논리다. ‘막말 논란’ 등에 휘말렸던 이 지사가 검증 기간이 길면 낙마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후보단일화협의회에 흔들렸던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 트라우마도 자극한다. ‘이재명 탈당설’까지 더해지면서 의도가 명확해진다. 이 지사 쪽은 “탈당은 없다”고 연일 강조한다. 하지만 대선 후보가 안 되면 당에서 뛰쳐나갈 사람이라는 부정적 인식을 확산할 수 있다. ‘제2의 이인제’로 낙인찍는 셈이다.
대선 레이스를 공식화한 박용진 의원, 이낙연 대표에게 경선 연기론은 딱히 불리할 게 없다. 경선 참여를 저울질하는 정세균 국무총리, 김경수 경남지사, 이광재 의원,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 이른바 ‘친문 인사’들에겐 단비 같은 소식일 수 있다. 문제는 당헌 88조에 손을 대는 순간 민주당은 걷잡을 수 없는 분란에 휩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재명 지사의 핵심 참모는 “당의 헌법인 당헌·당규는 존중돼야 한다는 게 공식 입장이다. 전제를 근거로 어떻게 대응할지 지금 답할 수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친이재명계를 자임한 민주당 의원들은 당헌 개정론에 “내전 선언”이라고 격한 반응을 보였다.
당헌 개정론이 잦아들지 구체화할지 현재로선 예측하기 힘들다. 다만 5월 전당대회를 통해 들어설 새 지도부가 이를 본격화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건 우려스럽다. 홍영표 의원 등 친문 인사들이 지도부에 포진하고, 1위를 달리는 주자를 뺀 모든 이들이 시간을 더 벌고 싶어 할 테니 당헌 개정이 힘을 받을 것이라는 분석인데, 위험천만하다. ‘친문 후보 부양’ 논란으로 비화할 경우 민주당이 풍비박산 날 수 있다. 이해찬 대표 체제의 민주당 지도부도 지난해 5월부터 ‘180일 전’ 당헌 규정을 ‘100일 전’으로 늦추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때도 ‘후보가 일찍 정해지면 공격받는다’는 게 핵심 논리였다. 하지만 8월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로 유력했던 이낙연 전 총리가 대표직을 마친 뒤 경선에 뛸 시간을 충분히 마련하는 ‘이낙연 봐주기’라는 말들이 나오는 등 역풍이 불면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계파 이익을 앞세워 당을 혼돈으로 몰아가선 안 된다. 특정인을 띄워 후보로 만들겠다는 꼼수로는 건곤일척의 승부가 펼쳐질 대선에서 민심을 얻을 수 없다. 이 대표와 이 지사의 부침에서 보듯 지지율은 언제든 변한다. 주어진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하고, 안 되면 다음을 기약하는 게 당당한 처신이다. 경선 연기론을 더는 연기처럼 피워 올려선 안 된다.
신승근 l 논설위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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