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천 칼럼] 저렴한 을들의 역습, 사회정의, 기본적 필요
‘저렴한 을들’의 오랜 고통과 희생 위에 굴러왔고 그 위에 올라타 불 밝혔던 성장중독 문명, 고삐 풀린 자본주의 시장 사회와 산업주의, 그리고 가부장제는 오늘날 유례없는 위기에 처했다. 그리하여 바야흐로 저렴한 을들의 존재성 또는 생명성 회복과 재창조를 위한 역습의 시대가 도래했다. 불평등, 차별, 자본세, 기후위기, 인류세, 미투 등의 말이 복합위기와 역습의 시대를 대표하는 시대 화두가 됐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또 너무 많은 것들이 지독하게 변하지 않았다. 사람이 먼저인 나라, 노동존중사회를 내세운 정부라지만 노동은 ‘저렴한 것’으로 피 흘리며 소진되고 있다. 투기적 불로소득 추구 행태가 번창한 가운데 노동자의 목숨값을 싸게 하고 기업의 책임을 가볍게 해야 경제가 살고 나라가 흥한다는 신념, 무책임 권력의 생리와 자본의 돈 버는 논리가 손잡고 강력한 위세를 떨친다. 어디 임금노동뿐인가. 정치색을 가릴 것 없이, 여성도 마구 저렴한 것으로 취급당한다. 기후악당국가인 한국에서 오래전부터 자연은 엄청 저렴하다. 또 무엇이 저렴한가? 대한민국의 밝음은 수많은 저렴한 것들의 희생과 어둠 위에 서 있다.
저렴함은 물론 저비용을 포함한다. 하지만 그것 이상이다. 지배체제의 재생산회로에 폭력적으로 포섭됨으로써 결코 수치로 셈해질 수 없는 소중한 존재의 자율성과 상생적 생명성이 박탈되고 부정된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제이슨 무어)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사이를 깊이 관류하는 생명 생태계 전반이 무너진다. 칼 폴라니가 노동, 토지(자연), 그리고 화폐의 ‘허구적 상품화’를 비판한 것, 도구적 계산합리성이 지배하는 형식적 경제와 모두의 좋은 삶을 위한 필요물자의 조달 양식으로서 실체적 경제를 구분한 것, 대항적 탈상품화와 민주화를 통해 인간의 살림살이와 사회생태 체계 전반의 재건을 추구한 것도 유사한 문제의식이었다고 하겠다.
‘저렴한 을들’의 오랜 고통과 희생 위에 굴러왔고 그 위에 올라타 불 밝혔던 성장중독 문명, 고삐 풀린 자본주의 시장 사회와 산업주의, 그리고 가부장제는 오늘날 유례없는 위기에 처했다. 그리하여 바야흐로 저렴한 을들의 존재성 또는 생명성 회복과 재창조를 위한 역습의 시대가 도래했다. 불평등, 차별, 자본세, 기후위기, 인류세, 미투 등의 말이 복합위기와 역습의 시대를 대표하는 시대 화두가 됐다.
현재진행형 위기는 실로 거대하고 다층적이다. 물론 단기적 시야의 정치공학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문제를 고립적이 아니라 상호연관된 복합체로 파악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특히 불평등위기와 기후위기의 밀접한 맞물림, 그리고 사회생태적 전환을 둘러싼 쟁투의 불가피성에 대해 말하고 싶다. 이제 인류는 기후위기의 극복 없이는 파멸할 수도 있는 위태로운 인류세 시대로 진입했다. 지배체제의 재생산 비용을 자연에, 노동에, 여성에 떠넘기면서 생태적 지속가능성, 사회적 정의, 그리고 경제성장 간의 균형을 무시해온 대가가 실로 엄청나다. 이는 발본적인 ‘생태적 성찰성’과 성찰적 시민정치를 요구한다. 하지만 지배적 권력과 전략, 제도 및 가치가 순순히 바뀔 리 만무하다. 저들은 끈덕지게 낡은 것의 재생산을 도모한다. 따라서 이중운동의 쟁투가 불가피하며 사회생태적 전환은 다양한 길로 열려 있다.
첫째, 생태적 전환 자체가 갈등으로 가득 차 있다. 진보적 생태경제학자 마르티네스-알리에르에 따르면 생태적 전환의 흐름은 자연보호운동, 생태효율성주의, 환경정의운동의 세가지 줄기로 구분된다. 자연보호운동은 상류층, 중산층을 중심으로 깨끗한 자연을 지키자는 움직임이다. 생태효율성주의는 오늘날 가장 강력한 흐름으로 부상했는데 생태효율성을 높임으로써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자는 흐름이다. 마지막으로 환경정의운동은 빈자 또는 약자의 환경주의와 직결되어 있는데 자연 및 자원 이용을 둘러싼 불평등과 치열한 분배갈등(‘생태적 분배갈등’)에 주목한다. 나아가 이를 사회정의, 경제정의 문제와 통합적으로 바라보려고 한다. 이들 세 줄기 간에는 깊은 간극이 있으며 이 간극과 긴장은 기후위기 대응 방식의 밑바탕에도 깔려 있다. 생태적 전환, 기후위기 대응 또는 탄소‘중립’의 추진이 마냥 중립적일 수 없는 이유다.
둘째, 생태적 전환 자체가 갈등으로 가득 차 있을뿐더러, 생태적 전환과 사회경제적 전환 간에 큰 간극이 있다. 생태적 전환이 달성된다 해도 사회경제적 불평등위기가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생태적 전환이 전인류적 과제로, 현세대는 물론 미래세대의 삶을 위해 절박한 과제로 떠올랐음에도 사회경제적 불평등위기의 극복 없이, 구성원의 삶의 기본적 필요 충족 없이 생태적 전환에 대한 폭넓은 사회적 합의가, 집단행동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인간과 자연 간의 불화 문제란 결국 인간과 인간 간의 불화, 이 불화를 재생산하는 부정의한 사회시스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충고를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인간-자연-인간의 삼각관계에 눈뜬 사회생태적 진보주의에서 자연의 저렴화에 따른 기후위기는 노동자, 여성 등 사회적 약자의 저렴화에 따른 불평등위기와 동전의 양면처럼 꽉 맞물려 있다. 이 통합적 전환 정치의 견지에 설 때 다면적 불평등위기의 극복 없이는, 정의로운 사회로의 전환 문제를 풀지 않고는 기후위기의 극복은 없다. 거꾸로 기후위기, 생태위기의 극복 없이는 불평등위기의 극복도, 정의로운 사회도 기약할 수 없다.
오늘날 복합위기와 마주해 사회정의, 정의로운 사회로의 전환은 지속가능성을 새롭게 끌어안아야 한다. 계급계층 간 정의, 젠더정의 등에 기후정의가 중첩된다. 기후정의는 세대 간 정의를 필수적으로 포함한다. 지속가능한 사회정의란 생태적 제약 아래 구성원의 기본적 필요 충족 우선 원칙이 핵심이다. 유엔 브룬틀란보고서가 “미래세대가 필요를 충족할 능력을 손상시킴 없이 현재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발전”에 대해 말한 것도 유사한 의미다. 브룬틀란보고서의 기본 생각은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에도 변용되면서 이어지고 있다. 지속가능한 기본적 필요에 기반해 정의로운 생태복지국가로 가는 세가지 원칙을 언급해 두고자 한다.
첫째, 어디까지가 기본적 필요인가. 기본적 필요 충족은 단지 생존 필요의 보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를 넘어 상대적 지위의 빈곤 및 자율적 행위주체로서 능력 빈곤을 탈피해 인간답고 시민다운 삶, 젠더 평등한 삶을 가능케 할 기본적 역량을 증진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최약자의 필요가 우선적으로 충족되어야 한다. 이 원칙은 경직적인 절대적 우선보다는 가능한 한 다수의 필요를 충족하면서 불평등을 축소하는 완화된 우선 원칙이 합리적이다.(김도균, <한국 사회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2020, 86~87)
셋째, 지속가능한 기본적 필요 충족을 위해 불평등의 대폭적 축소는 필수적 조건이다. 인류세 시대에 현세대, 무엇보다 약자의 기본적 필요, 그리고 미래세대의 필요 충족이 사회정의의 우선순위라고 할 때, 거기에 부합되지 않는 현재의 고삐 풀린 욕망 충족 행위는 정의롭지 못하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다.
이병천ㅣ강원대 명예교수·지식인선언네트워크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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