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년전 강제키스 혀절단 사건, 재심 기각한 판사의 장문 해명

박주영 기자 2021. 2. 18.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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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문장

강제 키스를 하려는 남성의 혀를 깨물어 끊은 혐의(중상해)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70대 여성이 56년 만에 정당방위를 인정해 달라며 법원에 낸 재심 청구가 기각됐다.

부산지법 제5형사부(재판장 권기철)는 “재심청구인 최모(75)씨의 재심청구 사건에 대해 재심 이유가 없어 기각 결정을 했다”고 18일 밝혔다.

최씨는 지난 1964년 5월 6일(당시 18세) 강제로 키스하려던 노모(당시 21세)씨의 혀를 깨물어 1.5㎝ 자른 혐의로 부산지법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최씨는 혀 절단에 대해 ‘정당방위'를 주장했으나 인정받지 못했다.

최씨는 재판 과정에서 6개월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법원행정처가 법원 100년사를 정리하며 1995년 발간한 ‘법원사’에 ‘강제 키스 혀 절단 사건’으로 소개돼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최씨는 2018년 미투 운동이 한창일 때 용기를 내 여성의전화와 상담했고 사건 56년 만인 지난해 5월6일 여성단체들의 도움을 받아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최씨는 재심 청구를 하면서 “저의 억울함이 풀리고 정당방위가 인정돼 무죄가 되기를 바란다”며 “법과 사회가 변화돼 후손들에게 이런 오점을 남겨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씨 측은 이 청구에서 △혀 절단으로 인해 언어 불능 등의 중상해를 입은 게 아님을 보여주는 새로운 증거들이 나왔다 △성적 자기 결정권을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였다 △당시 재판부가 정당방위 규정에 대한 해석과 적용을 잘못했다 △검찰 수사 및 재판 과정에 위법이 있었다 등을 재심 사유로 주장했다.

최씨 측은 재판에서 “당시 재판부에서 ‘(혀 절단으로)발음의 현저한 곤란을 당하는 불구의 몸이 됐다'고 판단한 노씨가 사건 후 말을 할 수 있었고 ‘불구의 몸'이 됐다면 군대를 갈 수 없었을텐데 운전병으로 월남전에 참전했다는 등 새로운 증거로 볼 때 최씨의 혀 절단 행위가 중상해죄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이에 대해 “당시 재판부의 ‘발음의 현저한 곤란을 당하는 불구의 몸'이란 판단은 언어 기능을 전부 상실했다는 것이 아니라 유창하게 말을 하지 못하게 됐다는 의미로 표현됐고 의학적 전문가의 관찰·진단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며 “‘발음에 현저한 곤란'은 형법상 중상해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발음에 현저한 곤란 상태'를 병역 면제 대상으로 단정할 근거가 없는 등 청구인들이 제시한 새 증거들이 재심 사유로 규정된 ‘무죄 등을 인정할 새롭고 명백한 증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또 “당시 재판부의 정당방위 규정의 해석·적용에 오류가 있었다”는 최씨 측 주장에 대해서는 “‘법률의 해석이나 적용의 오류가 발견된 때'는 법상 재심 사유에 해당되지 않는다”며 배척했다.

재판부는 당시 검사의 불리한 진술 강요, 법관의 성차별적 재판 진행 등 최씨 측 주장의 경우 “재판 과정에 변호인의 조력을 받았고 검사가 위법한 행위를 했다는 객관적이고 분명한 증거도 제시되지 않았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성범죄의 보호 법익을 현재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아니라 ‘여성의 정조', ‘성적 순결'에 두는 사회문화적 관념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던 1960년대의 공판 과정을 지금의 잣대로 평가하고 직무상 범죄라고 단정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판결문 말미에 “이런 결정을 하는 우리 재판부 법관들의 마음이 가볍지 않음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며 이 결정에 대한 장문의 해명을 이례적으로 적시했다. 재판부는 이 해명문에서 “오늘날과 같이 성별간 평등이 우리 사회가 지향할 주요한 가치로 실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면 사회 전반적으로 뿌리 깊었고 제도로서도 존재하던 성차별적 인식과 가치관이 지금만큼이라도 옅어져 있었다면 ‘최씨를 감옥에 보내지도 가해자로 낙인찍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감히 얘기한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또 “정당방위에 관한 법리를 논할 때 언제나 등장하고 회자됐던 ‘혀 절단 사건'의 바로 그 사람이 반세기 후 이렇게 ‘사건을 바로 잡아달라고,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달라고, 성별 간 평등의 가치를 선언해 달라'고 법정에 섰다”며 “재판부 법관들은 청구인의 재심청구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최씨의 용기와 외침이 헛되이 사라지지 않고,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우리 공동체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커다란 울림과 영감을 줄 수 있도록 ‘성별이 어떠하든 모두가 귀중하고 소중한 존재임을 선언한다”고 해명문의 끝을 맺었다.

이에 대해 부산여성의전화 측은 “법원의 판단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즉각 항고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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