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여성·하급자인 당신의 '번아웃'..당신 탓이 아니에요"
번아웃 증후군 원인은 개인 아닌 조직에 있어
“스트레스 상황에서 자신을 살피고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해요. ‘제가 조금 힘든데 5분만 감정을 가라앉히고 올게요.’ 이런 식으로 자신의 욕구나 원하는 바를 조금씩 표현해나가 보세요.”
지난 4일 서울 마포구 마인드맨션 의원에서 만난 안주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젊은 여성들이 직장에서 정신건강을 좋은 상태로 유지하려면 ‘내가 늘 착하고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 ‘내가 느낀 걸 솔직하게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난해 말 책 <내가 뭘 했다고 번아웃일까요>(2020, 창비)를 낸 안 전문의는 지금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번아웃’ 현상에 관해 이야기한다. 책은 번아웃 증후군의 원인이 개인이 아닌 조직에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직접 환자들을 만난 경험에 바탕해 이런 결론을 내렸다.
안 전문의는 약물치료와 상담 치료를 꾸준히 해도 스트레스를 부르는 환경이 개선되지 않자 환자들의 번아웃 증상이 잘 회복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저와 환자 모두 열심히 치료에 임하는데, 생각보다 증상 완화나 완치가 적은 거예요. 왜 그럴까, 고민해보았는데 저나 환자의 문제가 아닌 경우도 많더군요.” 우울증과 스트레스 질환을 치료할 때 생물학적·심리학적·사회학적 측면을 고루 살펴야 하는데, 세 가지 중 한 가지만 뒷받침되지 않아도 회복이 쉽지 않다고 그는 설명했다. 안 전문의는 “사회적 요인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심화하고 증상이 악화하는 젊은 여성 환자들을 보면서 비록 제가 엄청난 역할을 할 순 없지만 스트레스에 대한 사회적 접근을 살피고 이에 대한 발언을 피할 수 없는 시점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안 전문의는 특히 직장 내 여성 하급자의 스트레스와 소진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남성 중심적 문화가 팽배한 한국의 직장에서 하급자로 일하는 여성들이 직무 스트레스와 소진을 유발하는 환경에 쉽게 노출된다고 지적했다. 의사 결정권한이 적고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업무를 맡는 경우, 성과를 내고도 상급자에게 공이 돌아가는 경우, 조직에서 쉽게 교체되는 경우 등이 그 예다.
“직무에서 공로나 성과가 잘 눈에 띄지 않는 일을 여성들이 처리하고, 승진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은근히 배제되고, 결국 실무는 다 뒤집어쓰고 공로는 남성 상사가 가져가는 구도가 흔하다. 이런 상황이 지속하고 직장 내 다른 여성들도 비슷한 형국이면 ‘번아웃’이 올 수밖에 없다.” 그는 지적했다. 번아웃 증후군은 일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없을 경우 겪게 되기 쉬운데, 여성은 단기 일자리에 종사하는 비율이 높고 평균 소득도 남성보다 낮은 게 현실이다.
또한, 여성에게 상냥함이나 순종적인 태도를 지니도록 하는 사회적 압력도 번아웃을 유발하는 한 요인이 될 수 있다. “웃지 않았을 뿐 정중하게 대했는데 부드럽지 않게 말하면 무례하다고 합니다. 웃지 않고 말하면 불친절하다고 해요. 이처럼 직장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감정노동은 엄청나죠.” 그는 말했다. “어릴 적 가정에서부터 나보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먼저 생각하도록 자란 여성들이 회사에서 상사 기분, 클라이언트의 스트레스, 사무실 분위기 등을 살피다 보면 자기 자신은 소외됩니다. 그럴 경우 개인의 스트레스로 이어집니다.”
번아웃을 겪는 이들은 풀리지 않는 피로와 짜증 또는 예민함, 무기력, 수면장애, 소화장애, 만성통증 등을 주로 호소한다. 일 걱정이 떠나지 않거나, 모든 감정이 밋밋하고 감흥이 떨어질 수 있다. 생활리듬이 엉망이 되고, 고립되는 양상도 보인다. 근로복지넷이 제공하는 ‘직장인 소진척도’는 △출근 생각만 해도 피로한 ‘정서적 소진’ △내 직무의 중요성이 의심스러운 ‘냉소’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 ‘직업효능감 저하’ 등 15가지 항목으로 구성돼있다. 직장인 소진척도는 직무 스트레스 검사로, 근로복지넷에서 누구나 해볼 수 있다.
번아웃 증후군을 예방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안 전문의는 일상에서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할 것, 단호한 태도를 지닐 것, 일터에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트리거(결정적 요인)를 피할 것 등을 강조한다. 이와 함께 안 전문의는 ‘병든 사회에 잘 적응하는 것이 건강의 척도는 아니다.’라는 인도 철학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을 소개했다. 개인이 건강해지고자 노력하는 것과 함께 병든 사회를 개선하는 게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안 전문의는 개인의 노력보다 실제로 조직을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의 변화가 절실하다고 말한다. “‘번아웃’은 진료 현장에서 많이 접하는 증후군이면서 그 원인이 개인보다 사회 환경에 있어요. 근본적으로는 조직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는 주요 결정권자들이 달라져야 한다고 봅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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