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영화 '승리호'가 보여준 다국어 스페이스 오페라 / 조이스 박
[세상읽기]
조이스 박|영어교육가·에세이스트
조성희 감독의 <승리호>가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었다. 한국 최초의 우주 에스에프(SF)인 이 작품이 세계 많은 나라에서 1위를 차지하면서 주목을 끌고 있다. 이에 대한 여러 반응들 중 흥미로운 건 ‘나이지리아 피진어’와 ‘타갈로그어’에 대한 반응들이다. 아프리카 요루바족 출신의 이민자 자녀인 영국인 작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타이드 톰슨은 트위터(@tadethompson)에 “좋아, 난 <승리호>가 마음에 들어. 나이지리아 영화가 아닌데 나이지리아 피진어가 정확하게 나오잖아. 즉시 별 5개야. 진지하게 말하는데, 다문화 출연진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최고의 영화야”라고 평을 남겼고, 필리핀인들 역시 <승리호>에 타갈로그어가 나온다고 아주 좋아하며 반기고 있다.
<승리호>에는 한국어 이외에도 중국어, 아랍어, 피진어, 러시아어, 영어, 프랑스어, 타갈로그어, 스페인어, 덴마크어가 등장한다. 귀에 꽂은 통역기 덕분에 사람들이 자기 모국어를 하면 그게 다른 이들에게 자동으로 번역이 되어 들리는 설정이라서 관중들은 한국어로 된 영화를 보면서도 자막을 굉장히 많이 읽어야 하는 경험을 한다. 한국은 이미 더빙보다는 자막을 단 영화가 수십년째 대세인지라 익숙해서 괜찮지만,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외국어 영화는 주로 더빙을 하기 때문에 한국 영화 <기생충>이 미국에서 개봉했을 때도 자막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많았을 정도였다. 그들에게는 자막을 읽는 경험이 ‘조금’ 불편했을 수도 있겠다.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에스에프영화들을 보면서 저들이 만들어낸 세상에서는 어찌 외계인들도 죄다 영어를 하는지, 그 개연성에 다들 한번쯤은 의구심을 품어보았을 것이다. 나름대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과 ‘다양성’(Diversity), 그리고 그 어떤 소수자도 배제하지 않고 포함시키는 ‘포용성’(Inclusiveness)을 담아낸다고 하면서도, 할리우드 영화들은 여전히 백인이 주류인 세상에 다른 소수자들을 구색 맞추기로 끼워 넣는 구도를 대부분 그려왔다. 그리고 영어는 늘 지배적이었다. 언어 평등이라는 그림은 이 주류 영화에서 그려진 적이 없다. 하지만 <승리호>는 다국어가 혼재하고, 여러 인종이 관리직과 노동자 계층으로 섞여서 제시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영어가 보편어인 세상에 살고 있다. 비영미권 출신 화자가 하는 영어를 더 이상 브로큰 잉글리시(Broken English)라거나 피진(Pidgin)이라고 ‘공식적으로’ 부르지 않는다.(피진은 영어 등의 언어가 식민지민들에게 들어가 토착 언어와 섞이면서 변형이 된 언어를 일컫는 표현이다.) 1990년대 말 정도에는 영어가 세계로 퍼지면서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그 어떤 영어도 다른 영어보다 우월하지 않다고 하는 개념이 생겨났다. 이때 소문자 e를 쓰고 복수형인 englishes라는 개념이 나오면서, 한국인이 하는 콩글리시(Konglish)이건, 중국인이 하는 칭글리시(Chinglish)이건, 영국 영어와 미국 영어와 똑같이 ‘영어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보편어로서의 영어(ELF: English as a Lingua Franca)라는 개념이 뒤이어 등장했다. 하지만 보편어로서의 영어의 시대에 외려 영어의 지위는 강화되었다. 주요 과학기술 정보가 담긴 언어가 95% 이상 영어이고, 인터넷이 세계로 퍼져나가고 스마트폰을 정글에서조차 쓰게 되었다고 해도, 영어라는 장벽을 넘지 않으면 가장 유용한 정보들에 접근을 할 수가 없다.
한때 영어 하나밖에 못하던 이들이 영어가 상대적으로 어눌한 바이링구얼을 멍청하고 열등하다고 묘사했던 기록들이 있다. 지금은 멀티링구얼로 사는 것이 칭송받는 시대인지라 그런 기록들은 참 새삼스럽다. 이렇듯 열등한 존재에서 비범한 존재로 수십년 만에 바이링구얼의 위상이 바뀐 것처럼, 자동 통역기가 등장하면 특정 언어 사용자들에 대한 지위도 바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게 될 언어환경을 상상해보는 작업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 지점에서 <승리호>가 보여준 언어 평등 시나리오는 아주 의미심장하다. 영어가 주류인 미래상을 벗어난 청사진을 비로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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