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 특권, 변화..부호(富豪)들이 재산 절반을 내놓는 이유 [박성민의 더블케어]
한국은 경제 규모에 비해 기부에 인색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세청 등에 따르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기부금 비중은 2013년 0.83%(명목 GDP 기준)에서 2018년에는 0.73%로 오히려 낮아졌다. 미국(2.08%)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개인 탓으로만 여길 문제는 아니다. 한국은 세제혜택 등 기부를 유도할만한 인센티브가 부족하고, ‘기부연금’ 등 기부 활성화를 위한 제도 개선도 더딘 편이다. 척박한 기부 토양을 일구는 게 먼저라는 의미다.
● ‘기빙 플레지’는 어떤 단체?
김 의장이 재산 환원 의사를 밝힌 ‘더 기빙 플레지(The Giving Pledge)’는 2010년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부부와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이 설립한 글로벌 자선단체이자 자발적 기부 운동이다.
재산 10억 달러(약 1조1056억 원) 이상의 자산가가 재산 절반 이상을 환원하겠다고 서약하면 가입할 수 있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테드 터너 CNN 창업자,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 등 24개 국 218명의 자산가가 뜻을 같이했다. 김 의장은 219번째 회원으로 한국인 1호 가입자가 된다.
홈페이지에는 기부를 결심한 계기를 담은 서약서가 공개돼 있다. 기부자들은 특권(privilege), 변화(change), 행운(fortune) 등의 단어를 자주 언급한다. 자신의 능력뿐 아니라 주변 도움으로 커다란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그렇게 누려온 특권을 사회에 환원해 미래세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유사한 기부 캠페인도 생겨나고 있다. 영국 금융컨설팅회사 핀스버리의 롤런드 러드 창업자는 2011년부터 재산의 10%를 기부하면 상속세를 10% 감면해주는 ‘레거시10(유산기부 캠페인)’을 시작했다. 억만장자 기업가 뿐 아니라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등 정치권에서도 참여가 활발하다. 이미 제도가 정착돼 영국에선 유산 기부가 전체 기부금의 33%에 이른다.
● 유산기부, 기부연금은 아직 먼 얘기
한국은 아직 이런 기부 문화가 낯설다. 더욱이 재산의 절반을 뚝 떼어 기부하거나 생전에 유언장을 작성해 기부 의사를 밝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최근 1년간의 기부 경험을 기준으로 한 ‘기부 참여율’은 2011년 36.4%, 2015년 29.9%, 2019년 25.6%로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캐나다(82%), 영국(67%) 등 기부가 활성화 된 국가들과 격차가 크다.
개인의 선한 의지만으로 기부가 활성화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제도가 뒷받침돼야 한다. 유산기부를 유도할 수 있는 과감한 세제혜택도 그 중 하나다. 영국의 레거시10과 유사한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이 2019년 발의됐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세수(稅收) 감소가 우려된다’는 반대 논리를 넘지 못했다. 하지만 당장의 세수는 줄더라도 거액의 유산이 사회로 환원되면 정부의 복지지출 부담이 줄어드는 등 이득이 더 크다.
기부연금은 가계자산의 75%가 부동산에 집중된 한국인에게 특히 유용한 제도다. 현재 연금 수급액이 월 150만 원 이상인 고령층은 9.6%에 불과한데, 주택을 활용해 기부와 노후 보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2019년 보건복지부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20.6%가 기부연금에 가입할 의사가 있다고 답했다. 정부는 2011년부터 기부연금 도입을 추진했지만 관련 법안은 19대, 20대 국회에서 제대로 논의조자 되지 못한 채 폐기됐다.
● ‘세금 폭탄’이 기부 문화 위축시켜
기부를 망설이게 하는 요인 중 하나는 과도한 세금이다. 공익법인이 기업의 일정 비율 이상의 주식을 기부 받으면 증여세를 내야 한다. 증여세를 면제받으려면 일반 공익법인은 취득한 주식이 해당 기업 총 주식의 5%, 성실공익법인은 5¤20%를 넘어선 안 된다. 일부 대기업 등이 변칙 증여나 오너 일가의 계열사 우회 지배를 위해 재단을 만들어 주식을 증여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조세회피 의도가 없는 기부에까지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기부 문화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세금을 깎아서라도 부자들의 기부를 유도하는 해외 사례에도 역행한다. 영국과 호주, 독일은 주식보유 상한 기준이 없다. 이러한 기부 규제 완화는 부자들의 고액 기부로 이어진다. 워런 버핏은 지난해 29억 달러의 버크셔 해서웨이 주식을 가족이 운영하는 4개 재단과 ‘빌앤드멀린다게이츠재단’에 기부했다. 2006년부터 기부한 주식은 약 374억 달러에 이른다.
박성민기자 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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