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정치 '공신' 남발, 24m짜리 공신록, 국보 됐다.
남장사 괘불도, 고려사 목판은 보물로 지정
[헤럴드경제=함영훈 선임기자] 24m로 긴 일종의 공신임명공인서인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가 국보로 지정 확정됐다.
군부 쿠데타로 시작해 사화,환국 등 유혈 정권교체가 매우 많았던 조선은 승리자의 자축세레머니로 볼수 있는 ‘공신 인플레이션’이 극심했다.
한장 짜리 문서에 크지 않은 글씨인데도 이들 명단과 가문, 출결사항 등을 적는 것으로만 24m나 되는 것은 조선의 과도한 공신 잔치를 잘 말해준다.
이와함께 남장사 괘불도, 고려사 목판 등 12건은 보물로 지정됐다.
18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二十功臣會盟軸-保社功臣錄勳後)’(국보335호)는 1680년(숙종 6년) 8월 30일 열린 왕실의 의식인 ‘회맹제(會盟祭, 임금이 공신들과 함께 천지신명에게 지내는 제사)’를 기념하기 위해 1694년(숙종 20) 녹훈도감(復勳都監)에서 제작한 왕실 문서다.
이 의식에서는 이른바 ‘공신(功臣)’ 중 개국공신(開國功臣)부터 보사공신(保社功臣)에 이르는 역대 20종의 공신이 된 인물들과 그 자손들이 참석해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행사 출결 사항까지 적힌 이 공신녹훈 문서는 무려 24m나 된다.
군신 간 밀당, 정파 간 경쟁이 어느 시대 보다 치열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음모, 살육, 희비교차, 환국, 유혈 정권교체가 있었기에 조선 시대엔 공신 인플레이션이 심했고, 공신 잔치가 비일비재했다.
이십공신은 개국공신(開國功臣, 1392), 정사공신(定社功臣, 1398), 좌명공신(佐命功臣, 1401), 정난공신(靖難功臣, 1453), 좌익공신(佐翼功臣, 1455), 적개공신(敵愾功臣, 1467), 익재공신(翊戴功臣, 1468), 좌리공신(佐理功臣, 1471), 정국공신(靖國功臣, 1506), 광국공신(光國功臣, 1590), 평난공신(平難功臣, 1590), 호성공신(扈聖功臣, 1604), 선무공신(宣武功臣, 1604), 청난공신(淸難功臣, 1604), 정사공신(靖社功臣, 1623), 진무공신(振武功臣, 1624), 소무공신(昭武功臣, 1627), 영사공신(寧社功臣, 1628), 영국공신(寧國功臣, 1644), 보사공신(保社功臣, 1680) 등이다.
공신이 많다보니 나라에 공적을 세운 인물들에게 공신의 칭호와 관련 문서 등을 내리기 위해 임시로 녹훈도감이라는 관청도 만들었다.
회맹제가 거행된 시기와 이 회맹축을 조성한 시기가 15년 정도의 차이가 나는 것은 숙종 재위(1674~1720년) 중 일어난 여러 정치적 변동 때문이었다.
당시 남인(南人)과 더불어 정치 중심세력 중 하나였던 서인(西人)은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을 계기로 집권해 공신이 되었으나,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공신으로서 지위가 박탈되었다.
이후 서인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집권하면서 공신 지위를 회복하였고 이때 1등~3등까지 총 6명(김만기, 김석주, 이입신, 남두북, 정원로, 박빈)에게 ‘보사공신’ 칭호가 내려졌다.
이번에 국보로 지정된 회맹축은 숙종 연간 보사공신이 있기까지 공신으로 지위 부여(녹훈, 錄勳)와 박탈(삭훈, 削勳), 회복(복훈, 復勳)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실물자료이다.
경신환국은 1680년 남인이 서인에 의해 정치적으로 실각해 정권에서 물러난 사건이고, 기사환국은 1689년 숙종의 계비였던 희빈장씨의 원자(元子) 책봉 문제로 남인이 서인을 몰아내고 재집권한 일이다. 갑술환국은 1694년 서인들이 전개한 폐비 민씨(인현왕후) 복위 운동을 반대한 남인이 화를 입어 권력에서 물러나고 서인이 재집권한 사건이다.
이 문서는 역대 공신들, 그 후손들을 포함해 총 489명의 명단을 기록한 회맹록(會盟錄), 종묘에 올리는 축문(祝文, 제사 때 신에게 축원하는 글)과 제문(祭文)으로 구성되었으며, 축의 말미에 제작 사유와 제작 연대를 적었고 시명지보(施命之寶)라는 국새를 마지막으로 찍어 왕실 문서로서 완전한 형식을 갖추었다.
1680년 회맹연에는 참석대상 총 489명 중 412명이 참석했으며,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은 연로하거나 상(喪)을 당한 사람, 귀향 등으로 인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문화재청은 당시 파란만장한 정치적 상황을 보여주는 사료로서도 역사‧학술 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왕실유물 중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로 제작되어 조선 후기 왕실 공예품의 백미(白眉)로서 예술성 또한 우수하므로 국보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밝혔다.
보물로는 선원제전집도서 목판(禪源諸詮集都序 木板)(보물 제2111호), 원돈성불론·간화결의론 합각 목판(圓頓成佛論·看話決疑論 合刻 木板)(보물 제2112호),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목판(大方廣圓覺修多羅了儀經 木板)(보물 제2113호), 구미 대둔사 경장(龜尾 大芚寺 經欌)(보물 제2117호), 원나라 법전인 지정조격 권1~12, 23~34(至正條格 卷一~二十, 二十三~三十四)(보물 제2118호) 등이 지정됐다.
고려사의 경우 고려 말 문신 이제현(李齊賢), 안축(安軸) 등이 편찬을 시도했으나, 완성하지 못했다.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정도전(鄭道傳), 정총(鄭摠) 등 고려국사(高麗國史)를 편찬했으나, 현재 전하지는 않는다.
이후 1414년(태종 14) 태종이 변계량(卞季良), 이숙번(李叔蕃) 등에게 명해 고려국사의 수정편찬을 명하였으나, 완성되지 못함. 결국 세종이 즉위해 고려국사의 오류를 지적해 편찬을 지시했고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쳐 1449년(세종 31) 편찬에 착수해 1451년(문종 1) 완성되었다. 그러나 바로 인쇄되지 못하고 1454년(단종 2) 인쇄·반포되었다.
고려사는 조선 입장에서는 폄하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조선 초기(1~3대) 위화도 회군으로 왕실을 기습해 대권을 장악한 군부 정권은 역사에 대한 인식이 박약했기 때문에 고려사를 대놓고 무시했다. 조선 건국이후에도 고려 충신의 저항, 조선 신진사대부 개혁세력과 조선 창업세력 간의 갈등이 한동안 지속됐기 때문에 제대로 된 고려사를 만드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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