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그는 왜 '빌리 홀리데이'를 신청했을까?

조성관 작가 2021. 2. 18.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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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홀리데이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인간의 감각기관 중 가장 오래 살아남는 게 청각이다. 부모님과 병상에서 이별을 한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다 알아들으시니 마지막으로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

귀에 대고 뭐라고 말하면 부모님은 응답한다. 있는 힘을 다해 눈을 뜨거나 아니면 눈을 감은 채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생의 마지막 순간이 괘종시계의 초침처럼 째깍째깍 다가온다. 더이상 먹고 싶은 것도 없다.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을 간신히 떠올려 본다. 청각만이 희미하게 열려 있다. 무엇이 마지막 여행길의 동반자가 될 것인가.

기자들이 어떤 분야의 대가(大家)와 인터뷰를 할 때 종종 클로징 멘트로 던지는 질문이 있다.

"당신에게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과연 이 위대한 인물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반드시 한번은 오고야 마는 죽음에 대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을까.

20세기 인물 중 앨버트 아인슈타인(1879~1955)만큼 질문을 많이 받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언론 인터뷰나 수만통의 편지를 통해서. 아인슈타인은 말년에 기자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당신에게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아인슈타인이 대답했다.

"내게 죽음은 더이상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독일 울름 태생인 아인슈타인이 공부한 곳은 뮌헨이다. 여러 곳을 떠돌았지만 가장 오래 산 곳은 베를린. 스위스 베른과 취리히, 체코 프라하, 오스트리아 빈이 미국으로 가기 전 그가 잠깐씩 살거나 머물렀던 곳이다.

그린칭거 가 70번지의 플라크.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1927년부터 1931년까지 펠릭스 에렌하르트 박사의 손님으로 이 집에 머물렀다고 쓰여 있다. 조성관 작가 제공

아인슈타인이 빈을 방문하면 전원 지역인 그린칭거가(街) 70번지에서 지냈다. 아인슈타인은 이 집에서 1927년부터 1931년까지 머물렀다. 아인슈타인이 묵었던 집에서 두 집 건너면 베토벤이 살았던 64번지가 나온다. 베토벤은 이 집에 살며 1808년 저 유명한 '전원교향곡'을 작곡했다. 아인슈타인은 이 동네에 머무는 동안 옆집에 살았던 베토벤을 늘 생각했다.

모차르트는 빈과 프라하에서 음악가 인생의 전성기를 보냈다. 독일 본 태생인 베토벤은 모차르트를 흠모해 빈으로 왔고, 빈에서 생애를 마쳤다. 위대한 물리학자는 지상 최고의 음악적 환경에서 50대의 한 시기를 보냈던 것이다.

"내게 죽음은 더이상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음악처럼 인간의 삶에 강한 영향을 미치는 예술 장르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안락사가 허용된 스위스 바젤로 가서 104세에 스스로 삶을 선택한 호주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 박사를 우리는 기억한다. 구달 박사가 눈을 감기 직전에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들은 게 베토벤 9번 교향곡 '합창'이었다.

극단적 선택을 앞둔 남자의 신청곡

얼마 전 신문 사회면에 비지스의 히트곡 '홀리데이'가 제목으로 뽑혔다. '홀리데이'로 인해 그 기사를 단숨에 읽었다. 사건의 요지는 이렇다.

어떤 50대 남자가 극단적 선택을 결심하고 생방송 중인 대전의 라디오방송 담당 PD에 문자를 보냈다.

"생을 마감하면서 듣고 싶으니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틀어주십시오."

PD는 장난 문자가 아닌 리얼 상황임을 직감했다. PD는 30분 뒤에 노래를 들려드리겠으니 현재 상황을 설명해달라며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경찰에 전화를 걸어 긴급조치를 요청했다. 휴대폰 위치추적으로 문자를 보낸 위치를 확인한 경찰은 119와 함께 현장에 출동해 제초제를 마시고 자동차 안에서 신음 중이던 남자를 구조했다. 극단적인 선택을 결심한 50대 남자는 왜 그 순간에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듣고 싶어졌을까.

1977년 전성기 시절의 비지스. 위에서부터 배리, 로빈, 깁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추론을 해본다. 남자는 인생의 어느 길목에서 우연히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접했고 이 노래에 꽂혔다. 그 후 '홀리데이'를 수없이 반복해서 들었다. 인생의 힘겨운 고비마다 '홀리데이'를 틀어놓고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소울 푸드가 있는 것처럼 '홀리데이'는 남자에게 소울 뮤직이 아니었을까.

'홀리데이'는 1980년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탈옥사건에서 화제가 되었고,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주제곡으로도 쓰였다.

하루키가 틀어준 '빌리 홀리데이'

무라카미 하루키(1949~)는 전업 소설가로 나서기 전에 도쿄에서 7년간 재즈카페를 운영했다. 와세다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하루 종일 좋아하는 재즈나 들으며 살겠다며 고쿠분지(國分寺)역 근처 지하에 재즈카페 '피터 캣'을 열었다. 하루키는 재즈카페 경험을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비롯해 여러 책에서 단편적으로 기술했다.

'잡문집'에 보면 카페 주인의 눈에 비친 여러 단골 이야기가 나온다. 그중에 미국 흑인 병사와 일본 여자 커플이 있었다. 두 사람은 가끔 카페에 나타나 술을 마시다 가곤 했다. 미국 병사는 여러 번 카페 주인에게 노래를 신청했다.

"빌리 홀리데이 판 좀 틀어주세요. 빌리 홀리데이 노래면 아무거나 좋아요."

무라카미 하루키© AFP=News1

어느 날, 흑인 병사가 혼자 들어와 빌리 홀리데이(1915~1959)의 노래를 들으며 어깨를 들썩이는 모습이 카페 주인의 눈에 들어왔다. 1년쯤 지난 뒤 여자가 혼자 카페에 나타났다. 여자가 온더록스 위스키를 시켜놓고는 말했다. 남자친구가 미국 본국으로 돌아갔다. 고향이 생각날 때마다 남자친구는 이 재즈카페에 와서 빌리 홀리데이 노래를 들었다. 남자가 얼마 전 편지를 보내왔다. 이 재즈카페에 가서 빌리 홀리데이를 신청해 대신 들어달라.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좌표 위에서 살아간다. 누구도 시간을 잡아둘 수가 없다.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가는 게 시간이지만 때때로 그 시간은 특정 공간에 스며든다. 우리가 추억이 서린 곳을 찾아가는 이유는 그 장소에 가면 나의 잃어버린 시간이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의 기억들이 한꺼번에 맺히는 게 음악과 음식이다.

음식에 인생의 어떤 순간이 담겨 있는 것처럼 어떤 노래에는 그 노래와 얽힌 주변적인 기억들이 저장된다. 어떤 심리적 상태에서 누구와 들었고 그 주변의 풍경은 어땠는지. 코미디는 예측불가능한 반전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지만 노래는 예측가능한 경험을 공유하면서 감동이 인다.

가수 이문세의 라이브공연장에는 유명 연예인들도 찾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히트곡 중의 하나가 '그녀의 웃음소리뿐'이다. 나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서울 여의도의 거리 풍경이 마치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곤 한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원하는 신문사에 들어가지 못해 불안과 불만으로 가득 찼던 시절. 그때 여의도 상가 건물 1층의 레코드 가게에서는 하루에도 십수 번씩 '그녀의 웃음소리뿐'이 무심하게 흘러나왔다. 그때마다 내 발걸음은 잿빛 하늘처럼 우울했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흑인 병사는 왜 태평양 너머 도쿄의 한 재즈 카페에서 '빌리 홀리데이'를 들으며 어깨를 들썩였을까. 빌리 홀리데이와는 어떤 특별한 연결고리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긴, 빌리 홀리데이를 어떤 인연이 있어야만 좋아하게 될까. 진부하지만, 영혼을 울리는 보컬이라는 표현은 빌리 홀리데이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그녀의 노래를 듣고 어찌 그녀에 매료되지 않을 수 있을까. 대표곡 '앰 아이 블루' 말고도 히트곡은 수두룩하다. '오텀 인 뉴욕'을 들으면 낙엽 뒹구는 센트럴파크의 벤치가 생각나고, '아임 어 풀 투 원트 유'를 들으면 사랑에 괴로워하던 청춘의 시간이 오버랩되고, '글루미 선데이'를 들으면 그녀의 비참한 마지막 장면들이 겹쳐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나는 '도쿄가 사랑한 천재들'을 취재하면서 하루키가 재즈 LP판에 바늘을 올려놓던 고쿠분지 남쪽 출구 근처의 지하공간을 찾아간 적이 있다. 현재는 다른 공간으로 쓰이는 지하실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좁은 계단에 앉아 생각했다. 재즈를 들으려 이 계단을 오르내린 사람들을. 그 흑인 병사에게 '빌리 홀리데이'는 영혼을 울리는 소울 뮤직이었으리라.

재즈카페 피터 캣이 있던 빌딩의 지하실 입구. 조성관 작가 제공

한번은 TV에서 어린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는데 BTS의 '다이너마이트'가 나오자 축구선수의 3남매가 일제히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장면이었다. 비로소 '다이너마이트'가 어떻게 '빌보드 핫 100'을 석권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80대 파킨스 환자의 증세를 누그러뜨리는 것도 음악이고, 코흘리개 어린이들을 춤추게 하는 것도 음악이다.

유발 하라리와 재레드 다이아몬드, 그리고 이어령. 생존하는 세계적 석학이다. 우리는 이들의 명저를 읽을 때 잘 느끼지 못하는 감동을 때때로 주현미가 부른 트로트 한 곡에서 뭉클할 때가 있다. 도대체 음악이 뭐길래.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1802~1885)는 음악과 관련 이런 글을 남겼다.

"음악은 말로 담을 수 없는 것, 그렇다고 침묵할 수도 없는 어떤 것을 표현한다."

auth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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