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부활..윤석남 작품전
[경향신문]
·학고재갤러리, ‘윤석남: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 전
·채색 초상·설치로 되새기는 여성 독립투사의 삶과 정신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 윤석남, “100인 초상 완성할 것”
“여자가 어째서 남자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나?” “세상이란 남녀가 협력해야만 성공하는 것이다. 좋은 가정은 부부가 협력해서 만들어지고, 좋은 나라는 남녀가 협력해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는 언제부터 조선의 독립을 생각해왔나?” “한시도 독립을 생각하지 않은 일이 없다.” 1919년 항일 독립투쟁을 지원하던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지도자들을 체포, 심문하던 일제 경찰과 독립운동가 김마리아(1892~1944)의 문답이다.
항일 독립운동사에서 잊혀진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여성들이다. 일제에 맞서 많은 여성들도 죽음을 불사하고 독립투쟁에 나섰다. 하지만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소외됐다. 유관순을 비롯, 영화 <암살>과 TV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모델로 알려진 남자현, 윤희순 등 수명만 알려졌을 뿐이다.
실제로 국가보훈처 통계를 보면,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70여년 동안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이는 모두 1만5825명, 그 중 여성 독립운동가는 472명에 불과하다(2019년말 기준).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과 재조명 목소리가 높지만 포상자의 단 3%만이 여성이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투쟁 활동은 남성들의 ‘뒷바라지’로 여겨졌다. 가부장제 시대 속에서 ‘누구의 며느리, 아내’로 호명되면서 주체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기록되지 못했고, 결국 잊혀진 것이다.
우리들이 잊어버린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원로작가 윤석남(82)이 채색 초상화로 부활시켰다. 작품전 ‘윤석남: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학고재갤러리)를 통해서다. 한국 여성주의미술의 대모로 불리는 윤 작가의 작품들이라 더 주목된다. 전시장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정신, 활동상을 생생하게 만나는 자리다. 그들이 흘린 피와 뜨거운 열망을 상징하는 붉은 색조 속 화면의 부릅뜬 눈, 움켜쥔 거친 손은 그동안 우리들의 무관심을 질타한다.
전시에는 14명의 여성 독립운동가가 등장한다. 강주룡, 권기옥, 김마리아, 김명시, 김알렉산드라, 김옥련, 남자현, 박자혜, 박진홍, 박차정, 안경신, 이화림, 정정화, 정칠성이다. 또 전시장 안쪽에는 소외된 더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추모하는 설치작 ‘붉은 방’이 나와 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인물당 대형·소형 채색 초상화, 흑백의 연필 드로잉 초상화 등 각 3점으로 구성됐다. 연필 초상과 소형 채색초상은 사진자료를 바탕으로 사실적으로 그렸다. 반면 대형 채색초상(210×94㎝)은 전신 인물상이 배경과 상징성을 띤 소품 등과 함께 표현됐다. 작업 초기부터 소설가 김이경이 각종 문헌기록 등을 연구, 각 인물을 쓴 글을 공유하며 윤 작가가 미술가로서의 상상력을 더한 것이다. 전시 개막과 함께 김이경 작가의 글, 윤 작가의 그림을 실은 책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역사를 뒤흔든 여성 독립운동가 14인의 초상>(한겨레출판)도 출간됐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인물화로 화폭에 오롯이 ‘기록’하자면 그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담아내는 가가 중요하다. 생애와 정신, 특히 독립투쟁의 활동상을 응축시켜 녹여내야 한다. 작가는 인물의 눈과 손, 표정과 몸짓, 배경·소품·의상 등으로 이를 표현했다. 정신세계를 상징하는 눈은 대부분 정면을 똑바로 응시한다. 형형한 눈동자가 관람객의 눈과 마주치며 굳은 결기를 내보인다. 손은 크고 거칠다. 고단한 현실 삶을 새긴 것이다.
작가는 독립운동가 남자현을 그리면서 그의 왼손 무명지(약지)에 붕대를 감고, 앞의 상 위에는 붉은 피가 담긴 작은 그릇과 붓·종이를 놓았다. 실제 남자현이 조선의 독립의지를 알리기 위해 왼손 무명지 두 마디를 자르고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조선은 독립을 원한다)이라 쓴 혈서와 잘린 손가락 마디를 국제연맹에 보낸 사실을 표현한 것이다.
항일노동운동가 강주룡은 흰 저고리와 검은 치마를 입고 기와 지붕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일제의 노동착취 등에 항거하며 실제 을밀대 위에 올라가 고공 농성을 벌인 역사적 사실을 담아냈다. 또 박자혜의 경우 슬픔과 분노가 가득한 얼굴로 감옥에서 옥사한 남편 신채호의 유골함을 든 형상으로, 작가가 “개인적으로 가장 가슴에 와닿는 인물”이라는 김마리아는 그의 치열한 교육운동을 상징하듯 진취적 몸짓의 교육자로 표현했다.
인물들 저마다 기억돼야 할 서사를 강조하듯 작품들은 분채의 짙은 색이 두드러진다. 선들은 가느다란 세필의 먹선이지만 강인한 정신을 드러내듯 단호하고 힘이 있다. 그동안의 소외를 반전시켜 환한 조명을 비추듯 산뜻하고 선명하게 화면이 다가오는 것이다. 전시 출품작들은 윤 작가의 지난 10년 동안 노력의 결실이다. 2011년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을 본 후 초상화에 매료된 그는 30여년 서양화 작업을 접고, 민화를 바탕으로 한 한국화 기법을 다시 배웠다. 그리고 친구들, 역사속 잊혀진 여성들의 초상작업을 틈틈히 선보이며 필력을 다져온 것이다.
설치작 ‘붉은 방’은 칼로 오려낸 붉은 색 종이 콜라주 850점, 거울 70점이 세 벽면을 가득채운다. 바닥에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초상을 추상적으로 그려 넣은 50점의 나무 조각이 서있다. 아직 발굴되지 못한 더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조명하고, 그들의 정신을 기려야 한다는 성찰로 숙연해 지는 공간이다.
팔순이 넘었지만 여전히 경기 화성의 작업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윤 작가. “작업을 할 때가 가장 즐겁고, 힘이 솟는다”는 그는 특유의 씩씩한 목소리로 강조했다. “앞으로 여성 독립운동가 100인의 초상을 완성할 생각입니다!”
이번 전시는 학고재갤러리의 온라인 전시공간 ‘학고재 오룸’에서도 동시에 진행 중이다. 전시는 4월 3일까지.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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