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왜 김홍도에게 오랑캐황제를 그리게 했나
미국 경매에서 11억원 낙찰된 김홍도풍 호렵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환수해 국립고궁博 공개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성군 정조(1752~1800)의 다양한 업적 가운데 새로운 그림 주제로 ‘책가도(冊架圖)’와 ‘호렵도(胡獵圖)’를 그리게 한 것은 예술에 끼친 영향이 엄청났다. 책장에 놓인 서책을 중심으로 골동품과 문방구 등을 그린 ‘책가도’는 국왕을 상징하는 어좌 뒤 ‘일월오봉도’ 대신 놓이기도 했다. ‘호렵도’는 이름 그대로 오랑캐가 사냥하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책가도가 ‘문치(文治)’를 뜻한다면 호렵도는 ‘무비(武備·군사관련 준비)’를 강조한 정조의 정치철학을 대변한다. 두 그림 모두 단원 김홍도를 통해 처음 그리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홍도가 그린 책가도와 호렵도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문화재청이 국외소재문화재재단과 함께 지난해 미국 경매에 출품된 김홍도 화풍의 ‘호렵도 팔폭병풍(胡獵圖 八幅屛風)’을 국내로 환수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한다고 18일 밝혔다. 병풍 전체 길이 392cm, 높이 154.7cm이 유물은 지난 2020년 9월 크리스티 뉴욕경매에 김홍도파(派) 호렵도로 소개됐고 11억원에 낙찰돼 고국으로 돌아왔다.
김홍도가 호렵도의 대표화가임에도 그의 작품은 조선 후기 실학중심의 농촌경제정책서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기록으로만 남아있다.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호렵도 병풍은 민화풍으로 그려진 것이다. 반면 이번에 환수한 호렵도는 웅장한 산수 표현과 정교한 인물표현 등이 수준 높은 궁중화풍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고, 조선 시대 호렵도의 시작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서 가치가 높다. 작품을 분석한 정병모 경주대 초빙교수는 “정조 때, 청나라 황제의 가을사냥 장면을 김홍도 화풍으로 그린 궁중화원의 그림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호렵도 중 예술적 완성도가 가장 높은 작품”이라며 “북학 정책 속에서 자존의식을 지키고자 한 정조 대 외래문화의 수용태도, 국방의 정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도 크다”고 평가했다.
오랑캐라 낮춰 부르는 ‘호(胡)’자를 써가며 굳이 청나라 황제의 사냥 그림을 그리게 한 이면에는 이처럼 복잡하면서도 정교한 정조의 생각이 반영됐다. 중국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고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을 연이어 겪은 조선에서는 청을 배척하는 의식이 컸다. 18세기 후반,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청의 신문물이 유입되자 쇄국정치 만을 고집할 수 없는 노릇이 됐다. 홍대용·박제가·박지원 등 젊은 지식인들을 주축으로 생겨난 북학파(北學派)의 의견을 수용한 정조는 적극적인 개방정책을 펼쳤다. 오랑캐 나라를 증오하면서도 청의 문화를 배울 수밖에 없는 복합적인 상황을 담은 것이 바로 ‘호렵도’였다.
이번에 환수된 호렵도 속 주인공은 청나라 황제 건륭제일 가능성이 높다. 정병모 교수는 “푸른색 가죽옷의 가슴과 어깨에 곤룡포처럼 섬세한 용이 그려져 있어 그가 황제임을 표시한다”면서 “정조가 1780년 여름 건륭제 칠순잔치에 박명원 등의 사신을 파견한 것을 계기로 청과의 관계가 호전된 만큼, 북학 정책의 하나로 그려진 호렵도 속 황제는 건륭제로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도 당시의 사행을 계기로 탄생했다. 정조는 건륭제가 서화를 감상하고 진귀한 기물의 진열대로 ‘다보격(多寶格)’을 둔 것에 착안해 책가도를 제작하게 했다고 하니 인연이 남다르다. 18세기 최강국으로 성장한 중국의 황제를 무조건 배척하지 않고 앞선 문물을 수용해 조선의 발전을 이끌고자 한 정조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정 교수는 “정조가 북학 정책으로 ‘문(文)’의 측면에서 책가도, ‘무(武)’ 측면에서 호렵도를 통해 청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면서 “이번 호렵도에서는 조선에서 실제 사용되지 않은 무기인 철퇴 모양의 연추, 창 모양으로 수비기능을 겸한 당파, 청의 기마술인 마상무예 등을 확인했는데, 이것은 황제의 사냥이 단순 유희가 아니라 지금의 팀스피리트 훈련에 비유할 수 있는 대형 훈련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호렵도와 책가도는 왕실에서 시작됐으나 19~20세기 민간으로 확산돼 복을 부르고 액을 막는 길상적 의미로, 기법은 민화 화풍으로 변했다.
이번에 환수된 호렵도는 18일부터 국립고궁박물관 내 궁중서화실에서 공개된다.
전시될 호렵도는 비단 바탕의 8폭으로 이루어진 연결병풍으로, 산수의 표현과 화면 구성이 탁월하며 인물과 동물의 묘사가 생동감 있고 매우 정교하여 호렵도 중에서도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오른쪽에서 시작되는 병풍 그림의 구성은 폭포를 시작으로 스산한 가을 분위기의 산수가 숙달된 화원 화가의 필치로 묘사되어 있는 제1~2폭, △화려한 가마를 타고 길을 나서는 황실 여인들이 묘사된 제 3폭, △푸른 바탕에 흰 용이 새겨진 복식 차림의 청 황제와 다양한 자세의 기마인물들이 등장하는 제5폭, △호랑이와 사슴을 향해 활을 겨누거나 창과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사냥꾼들이 역동적으로 묘사된 제7~8폭으로 구성됐다.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이번 환수를 통해 그동안 민화를 중심으로 했던 호렵도 연구의 외연을 확장하고, 전시·교육 등 폭넓은 활용으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면서 “코로나19로 인한 국외문화재 환수여건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국외소재문화재 발굴과 환수에 최선을 다하는 동시에 정부혁신 사업의 하나로 적극적인 공개와 활용을 통해 우리 국민의 문화유산 향유 기회를 확대하고 자긍심을 고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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