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조가 유행시킨 '호렵도' 미국서 귀환
군사 참고 자료로 제작됐다 감상용으로 퍼져
미 크리스티 경매서 8폭 병풍 호렵도 환수
18일부터 국립고궁박물관 궁중서화실서 감상
‘삼전도의 굴욕’을 까맣게 잊었던 걸까.
18세기 말 ‘개혁군주’ 정조(재위 1776~1800) 시대에 접어들자 왕실과 양반 세족 사이엔 이상한 그림 풍습이 퍼졌다. 1637년 선왕인 인조의 무릎 꿇리고 굴욕적인 항복을 받아낸 청나라 황실 귀족의 사냥을 그린 그림이 ‘오랑캐가 사냥하는 그림’이란 뜻의 ‘호렵도’란 이름으로 크게 유행했다. 호렵도가 대유행하면서 집집이 소장 바람이 일어났다. 심지어 청나라에 가는 사신단에 부탁해 현지의 사냥도를 입수하는 경우도 있었다.
더욱 희한한 것은 이런 호렵도 유행에 앞장선 사람이 바로 정조였다는 점이다. 그는 1780년 청나라 수도 연경(베이징)에 사신단으로 가 호렵도를 익힌 당대 최고 화가 단원 김홍도(1745~1806?)에게 명해 호렵도를 그리게 해 궐 안에 붙이고 왕족과 신하들에게도 감상하도록 했다. 선대 왕에 치욕을 안긴 오랑캐의 그림을 왜 널리 퍼뜨렸을까.
당시 조선인들은 청나라에 이중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다. 17세기 초, 만주족의 청나라가 기존의 한족 왕조 명나라를 대신해 중국을 지배하자 조선은 갖은 수난을 당했다. 청의 침략 전쟁인 정묘호란(1627)에 이어 병자호란(1636)을 잇따라 겪으면서 청나라 태종 숭덕제(홍타이지)에게 임금 인조가 항복하는 치욕을 겪는다. 그 뒤 조선에는 북벌론이 일면서 청을 오랑캐 나라로 배척했지만, 18세기 후반 당대의 강대국인 청의 문물이 대거 유입되면서 청나라 문화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높아졌다. 이러한 배경 속에 유비무환을 강조한 정조(1752-1800)의 국방정책과 맞물려 애초 군사전략을 위한 참고용 자료로 호렵도가 제작됐다가 감상용으로 널리 퍼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선진 문물의 본산이던 청나라에 대한 호기심과 선망이 배경에 깔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삼전도의 치욕이 있은 지 140여년이 지나면서 조선에서는 청에 대한 경계와 증오는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청이 초강대국으로서 번영하자 청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이자는 ‘북학론’이 일어났고, 내외 정세를 꿰뚫어 본 정조가 이에 호응해 유목민 국가 청의 무예적 기풍을 잘 드러낸 호렵도의 유행을 선도했다. 당대의 블록버스터 대작이라고 할 만한 호렵도가 양반 세족을 넘어 일반 백성에까지 볼거리로 널리 전파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민중 사이에서는 주인공을 조선의 장수로 변형시키고 해태, 기린, 백호 등 신령한 동물도 출몰하는 벽사·길상의 그림으로 바뀌어 구한말까지 유행하게 된다.
<호렵도> 중에서도 명품으로 평가되는 작품이 최근 미국에서 경매를 통해 돌아왔다.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지난해 9월 미국 크리스티 경매에서 사들여 11월 국내로 들여온 <호렵도> 병풍을 18일 서울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했다.
이 병풍은 재단 쪽 관계자가 미국 쪽 경매에 나온 유출 문화유산을 검색하는 과정에서 찾아냈다고 한다. 여덟 폭 비단 화폭에 사냥 나온 황제 일족과 주변 풍경, 사냥 장면 등을 그려 채색했는데 전체 길이가 392cm, 높이는 154.7cm에 달하는 대작이다. 산수의 표현과 화면 구성이 탁월하며 인물과 동물의 묘사가 생동감 있고 정교한 것이 특징이다. 회화사연구자인 정병모 경주대 교수는 “국내에 전하는 호렵도 가운데 완성도 높은 수작”이라고 말했다. 작품의 구성을 살펴보면, 웅장한 자연 속에서 사냥에 참여한 황족 일행의 묘사를 거쳐, 역동적인 사냥 현장의 풍경으로 시점을 옮겨간다. 1~2폭은 폭포를 시작으로 스산한 가을의 산수풍경이 숙달된 화가의 필치로 담겨 있다. 3폭은 화려한 가마를 타고 길을 나서는 황실 여인들의 우아한 모습을, 4폭에서는 나발과 동각을 불거나 활을 쏘는 사냥꾼 무리의 다양한 동작을 보여준다. 푸른 바탕에 흰 용이 새겨진 복식 차림의 청 황제와 다양한 자세의 기마 인물이 나오는 5폭, 호랑이와 사슴을 향해 활을 겨누거나 창과 철퇴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사냥 장면이 박진감 넘치게 묘사된 7-8폭이 뒤를 잇는다. 특히 황족 일족 가운데 가슴과 어깨에 용이 그려져 있는 청색 가죽옷 ‘행괘(行褂)’를 입은 황제(건륭제로 추정)가 정교하게 묘사됐다.
이 작품은 크리스티가 애초 경매 출품작을 공지할 때 단원 김홍도의 작품이라고 소개해 국내 학계의 기대를 모았으나 전문가 감정 결과 김홍도 화풍을 본뜬 후대 화원의 작품이라는 결론이 났다. 산과 나무의 표현 등에서 연잎 줄기나 성긴 마의 올 같은 형상으로 묘사하는 단원의 화풍을 구사하지만, 인물 묘사 등에서 차이가 분명해 단원의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나왔다. 19세기 초 서유구가 펴낸 농경 정책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는 단원이 호렵도를 그렸다는 기록이 전하지만, 현재 그가 그린 작품은 단 한 점도 전하지 않는다.
현재 국내에 있는 대부분의 호렵도 병풍은 길상과 벽사를 담은 세속적인 민화풍이다. 환수된 호렵도는 웅장한 산수와 정교한 인물 표현 등 궁중 화풍의 품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회화사적 가치가 각별하다는 평가다. 재단 쪽은 “조선 후기 호렵도의 맹아를 보여줄 뿐 아니라 민화로 세속화되기 이전 궁중회화의 격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작품”이라며 “민화를 중심으로 했던 호렵도 연구의 외연을 넓힐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작품 실물은 국립고궁박물관 궁중서화실에서 볼 수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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