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 국제사법재판소 회부안이 30년 만에 나온 이유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 회부해 달라고 공개 요청하면서 한-일 정부뿐 아니라 시민사회·학계까지 향후 사태 전개를 주시하고 있다. 국제사법재판소를 통해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안이 공론화된 것은 1991년 고 김학순 할머니의 첫 공개 증언 이후 30년 만에 처음이다.
국제사법재판소 회부 그동안 왜 전면에 제기되지 않았을까?
‘위안부’ 문제를 국제분쟁기구로 가져가 판단을 받아보자는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다. 1994년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를 비롯한 한국 시민사회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과 일본 정부의 배상 의무에 대한 해석을 네덜란드 헤이그의 상설중재재판소(PCA)에 맡기려 했다. 헤이그재판소는 다른 국제재판소와 달리 국가가 아닌 개인이 당사자로 참여할 수 있다. 당시 한국과 일본 시민사회는 법률자문단을 구성하며 제소를 추진했지만, 일본 정부가 1995년 이 제안을 거부하면서 무산됐다.
한국 정부는 해법으로 검토하지 않았을까?
활발한 민간 활동과 달리 한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는 방안을 공식 언급한 바 없다. 외교부 등 부처 내부적으로 관련 사항을 살펴보았을 뿐 정책으로서는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았다고 한다. ‘위안부’ 문제의 위상에 비해 복잡한 전략적 고려가 요구되는 국제사법재판소 회부가 실효성 있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증언으로 ‘위안부’ 문제가 역사의 전면에 재등장한 뒤, 일본 정부는 ‘국민 모금’ 등을 통해 만든 ‘아시아 여성기금’(1995~2007년)을 통해 이 문제를 봉합하려 했다. 기금이 설립된 뒤 한국 정부는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다. 정부의 태도가 변한 것은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 등의 배상청구권 문제에 대해 구체적 해결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2011년 8월30일에 나온 뒤다. 헌재 결정 이후 정부는 청구권협정 제2조의 대일 청구권에 ‘위안부’ 피해자 등의 배상청구권이 포함되는지에 대한 해석 차이 등 문제를 제3조에 명시된 ‘외교상 경로’(1항)나 ‘중재위원회 회부’(2항)를 통해 해결하기 위한 협의를 진행했다. 중재위는 일본 쪽 거부로 구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일 간 외교 협의가 이뤄져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5년 12월 한-일 정부 간 ‘위안부’ 합의로 귀결됐다.
일본 정부는 어땠을까?
일본 정부는 독도,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 ‘위안부’ 문제 등 여러 현안에 대해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가능성을 언급해 왔지만, 한국에 공식 제의한 적은 없다. 독도와 관련해선 2012년 8월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상륙 직후,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과 관련해선 2018년 10월30일 한국 대법원이 신일철주금(현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강제징용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리자 아베 총리가 직접 회부 가능성을 거론했다. ‘위안부’와 관련해선 서울중앙지법이 지난달 8일 ‘일본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1억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한 뒤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상이 국제사법재판소 회부를 포함한 “모든 선택 사항을 시야에 넣고” 대응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한-일 정부 국제사법재판소로 향할까?
하지만 이용수 할머니의 구체적 제안이 나오자 한국과 일본 정부 모두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 정부는 “위안부 할머니 등의 입장을 조금 더 청취”하고 “국제사법제판소 제소 문제는 신중하게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일본 정부도 “어떤 의도와 생각으로 발언한 것인지 알지 못해 언급을 삼가려 한다”는 반응에 그쳤다.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 ‘위안부’ 제도가 당시 국제법상 범죄였다는 점을 인정하지도 적극적으로 부정하지도 않고 있다. 대신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이 문제가 해결됐다는 주장만 반복하고 있다. 일본 정부로서도 고려사항이 많다는 방증으로 풀이된다.
유엔 헌장에 규정된 유엔의 주요 사법기관 중 하나인 국제사법재판소의 판단을 받으려면 분쟁 당사국 간 합의가 필요하다. 한국 정부가 재판에 회부하겠다고 결정해도 일본 정부의 동의 없이는 회부가 불가능하다. 외교부 안팎에서는 일본 정부가 국제사회에서 ‘위안부’ 문제가 재점화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며, 미국 행정부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기 힘들다는 점 등을 고려해 강제징용 문제도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시도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양쪽이 국제사법재판소 판단을 받기로 큰 틀에서 합의해도 구체적으로 어떤 쟁점을 가져갈지를 놓고 합의에 이르기 어렵다는 점도 지적된다. 국가가 타국과의 국제재판을 하기 전 가장 먼저 고려할 사항은 ‘승소 가능성’인데 그간 정부 쪽 검토 과정에서는 ‘승소 여부는 예단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또 국제사법재판소 회부가 청구권 협정에 따른 중재보다 유리하다는 보장도 없으며, ‘위안부’ 피해자들이 강제 동원된 일본군의 ‘성노예’였다는 사실을 확고한 증거에 기반해 입증해야 하는 과제도 있다. 고령인 생존 피해자 15명 가운데 원활한 의사 소통이 가능한 피해자는 손에 꼽히는 상황에서 일관성 있는 증언 정리도 쉽지 않다. 법리적으로 1965년 청구권 협정과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로 문제가 해결됐다는 일본 쪽 주장이 국제법 전문가들을 설득할 가능성도, 현재의 인권법이 아닌 당시 국제법을 기준으로 일본의 행위가 위법했다는 판단을 얻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부 관계자들이 현 단계에서 국제사법재판소 회부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고 반응하는 이유다.
국제사법재판소 회부에 대한 기대
이용수 할머니는 16일 기자회견에서 “나는 지금까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며 “이제는 방법이 없다. 우리 정부가 국제법으로 일본의 죄를 밝혀달라. 일본이 잘못을 깨닫고 반성하도록 국제사법재판소(ICJ)에 판단을 받아달라”고 호소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국제사법재판소 회부 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 쪽은 일본 정부가 지난 1월 ‘위안부’ 제도의 주체가 일본 정부라는 점을 인정한 서울중앙지법의 판결을 “일개 한국 국내 법원의 판결로 여기고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며 권위 있는 국제사법재판소로 갈 것을 제안했다. 또 이 판결이 “금전배상을 명령하는 것에 그쳐 일본의 진정한 법적 책임 인정, 역사교육 반영 등 피해자 인권 구제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이유도 들었다.
추진위 쪽 법률 검토를 맡은 신희석 박사(국제법)는 “예단할 수는 없지만 (국제사법재판소가) 실체적으로는 ‘위안부’ 제도가 당시 국제법을 위반한 전쟁범죄로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한편 “절차적으로는 개인 배상청구권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포기됐고, 한국 법원은 일본의 주권면제를 존중해야 한다”고 판단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한국 입장에서는 피해자들의 개인 배상청구권은 상실되지만 일본의 법적 책임은 인정되고 일본의 사죄, 진상규명 등 법적 의무가 남는다는 주장이다. 패소한다고 해도 “‘위안부’ 제도에 관한 자료, 증언 등을 과거 (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재판인) 뉘른베르크 재판, 도쿄 재판 때처럼 방대한 역사 기록으로 영구적으로 남길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고도 꼽았다. 신 박사는 “우리나라가 ICJ에 한 번도 소송해 본 경험은 없지만 승산이 있다”면서 2014년 오스트레일리아(호주)가 일본의 무리한 고래잡이를 문제 삼아 제기한 ‘국제포경규제협약 위반’ 소송에서 일본이 패소한 사례, 2019년 4월 세계무역기구(WTO) 분쟁해결기구가 일본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금지 관련 사건에서 한국 승소 판정을 내린 사례 등을 꼽기도 했다.
국제사법재판소 회부를 둘러싼 우려
국제법 전문가들은 이런 접근에 우려와 의문을 제기했다. 피해자들이 청구권 협정에도 개인 배상청구권이 남아있다는 입장을 전제로 일본의 법적 책임과 배상을 요구해왔는데, 추진위의 예측대로 판결이 나온다면 국제사법재판소의 판단을 받는 것보다 ‘잃는 것’이 클 수 있다는 것이다.
김창록 경북대 교수(법학)는 지난 16일 국제사법재판소를 통해 ‘위안부’ 제도가 당시 국제법을 위반한 범죄라는 사실을 확인 받는 대신 피해자들의 개인 배상청구권은 청구권 협정으로 포기되고 일본의 주권면제가 존중돼야 한다는 판단을 허용하는 “폐해는 실로 심각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복수의 법률전문가들도 이런 판단이 나온다면 2018년 대법원 판결과 지난 1월 서울중앙지법 판결의 의미를 왜곡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두 판결이 청구권 협정 및 국가면제 불인정에 따른 국제법 위반이라는 일본 정부의 주장에 힘을 싣는 격이어서 그간 국내외에서 이뤄온 노력을 무위로 돌려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일본 정부의 능동적인 책임 인정과 사죄라는 피해자 할머니들의 본질적 요구는, 이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옮긴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이미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상식으로 자리 잡은 데다 일본도 제한적으로 인정한 터여서 국제사법재판소를 통해 사실 관계를 인정받아야 할 단계가 아니라는 점도 국제사법재판소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거론된다. 앞서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1994년 유엔 국제법률가위원회의 ‘위안부-끝나지 않은 시련’ 보고서(일본의 도의적, 법적 책무 인정) △1996년 유엔 인권위의 ‘전시의 군사적 성노예 문제에 관한 북한과 남한, 일본 파견 조사 보고서’(일본군 위안부를 “군사적 성노예”라고 단정하고 일본의 법적 책임 인정) △1998년 유엔 인권소위원회의 ‘2차대전 중 설치된 위안소에 관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분석’ 보고서(맥두걸 보고서·일본 정부의 개인배상 및 “강간소” 설치·감독 책임자 소추 제기)에서만 아니라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1994년, 2003년, 2004년, 2009년·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과 배상 등을 촉구)와 유엔 고문방지위원회(2007년), 시민적 정치적 권리위원회(2008년) 등을 통해서도 확인된 바 있다.
정부 관계자 및 다수 국제법 전문가들이 한-일 간 분쟁의 국제사법재판소 회부에 회의적인 또 다른 이유는 독도 문제 때문이다. 일본은 1950년대부터 독도 문제의 국제사법재판소 회부를 주장해와 한국 정부가 ‘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면 일본은 독도 문제를 같이 가져가자고 주장할 가능성이 높다. 그간 독도를 둘러싼 영토 분쟁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한국 정부 입장에서는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16일 추진위 기자회견을 우려의 시선으로 본 이들의 밑바닥에는 피해자 할머니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결과 도출을 위한 충분한 검토와 전략적 판단이 선행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지은 기자 mir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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