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냐 배움이냐'.. 淸을 향한 조선의 이중적 시선 '호렵도'
"알려진 호렵도 중 예술성 가장 뛰어나"
청 문물 수입 증거지만 '오랑캐' 그림이라 비하
김홍도 화풍 적용해 조선화된 방식으로 표현
‘야만’이라 여겼던 만주족의 수장에게 ‘신하의 예’로 항복한 삼전도의 굴욕(1637년) 이후 조선에게 청나라는 복수와 극복의 대상이었다.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북벌론’은 현실성이 없었으나 오랫동안 조선 지배층의 목표였다.
그러나 강희·옹정·건륭 세 황제의 치세(1661∼1796)에 최전성기를 맞은 청나라를 배척의 대상으로 둘 수는 없었다. 적개심을 털어낼 수는 없었으나 문물을 배우고, 수용해야 할 필요는 있었고, 그렇게 ‘북학’이 시작됐다.
◆황제의 사냥 그림을 ‘오랑캐 그림’이란 비하한 이유
조선에서 수입의 대상이 된 청나라의 사냥 그림은 황제가 매년 가을 목란위장(木蘭圍場)에서 왕족, 신하들을 데리고 벌인 대규모 사냥을 그린 기록화적인 성격을 가진다. 사냥에 특히 적극적이었던 게 건륭제다. 그는 재위 59년 동안 40번이나 목란위장을 찾았다고 하고 11명의 궁정화가를 동원해 가장 크면서도 세밀한 ‘목란도’를 그리게 했다.
황제의 정기적인 사냥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군사훈련의 성격이 짙었다. 특히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소수민족이어서 인구가 많고 문화수준이 높은 한족, 변방을 위협하는 몽골족 등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상시적이고 강력한 무력이 필수였다. 사냥은 실전과 가정한 훈련이었다.
18세기 들어 조선은 청나라와의 교류를 늘리면서 다양한 문화를 수입했고, 사냥 그림도 그 중 하나였다. 정조대(1776~1800)에 호렵도가 그려지기 시작했다는 건 군사력 강화를 강력하게 추진한 국정운영 기조를 반영한 것기도 했다.
◆김홍도 화풍으로 조선화시킨 호렵도
기존의 호렵도 중에도 김홍도의 영향을 보여주는 작품이 있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호렵도 8폭 병풍이 그것이다. 리움 소장품은 환수된 호렵도 병풍과 비슷하게 황제의 행렬을 중심에 두고 사냥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배경인 산은 “금강산 사군첩에 보이는 토산, 암산의 표현법과 유사하고 구부러지고 비틀린 잡목은 단원의 화법에서 많은 보이는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사진=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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