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왜 오랑캐 황제의 사냥 그림을 그리라 했을까..'호렵도' 구입 환수 첫공개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2021. 2. 18.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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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미국에서 구입환수한 ‘호렵도 8폭병풍’. 오랑캐, 즉 청나라 황제의 사냥모습을 그린 정조 시대 그림이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호렵도(胡獵圖)’라는 그림이 있다. 문자 그대로 오랑캐(胡)가 사냥(獵)하는 그림이다. 여기서 오랑캐라 함은 청나라(1616~1912)를 뜻하므로, 호렵도는 청나라 황제의 사냥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이 호렵도가 18세기 이후 조선에서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알다시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대륙을 차지하면서 조선에서는 ‘소중화’의 의식이 팽배해져서 겉으로는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맺었지만 속으로는 ‘오랑캐’라고 멸시했다. 그런 상황에서 무슨 ‘호렵도’ 그림이라는 말인가. 그러나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호렵도’의 주인공이다. 푸른 바탕에 흰 용이 새겨진 옷차림으로 보아 청나라 황제로 짐작된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사실 ‘오랑캐의 사냥’이라는 명칭이 웅변해주듯 이 그림에는 청나라에 대한 조선인의 증오와 열망이라는 이중적인 감정이 뒤섞여 있다. 청나라를 ‘되놈’, 즉 오랑캐로 폄훼해왔지만 17~18세기, 즉 강희제(1661~1722)·옹정제(1722~1735)·건륭제(1736~1796)를 거치는 동안 선진문물을 향유하며 융성해가던 청나라를 배우자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청나라를 미워하면서도 그런 청나라를 배울 수밖에 없는 이중적인 의식이 퍼졌다.

그중에서도 극단적인 ‘북학파’로 꼽히는 박제가(1750~1805)는 <북학의>에서 “중국을 배우자”는 뜻의 ‘학중국(學中國)’ 표현을 20번 이상 반복하기에 이른다. 이 무렵 즉위한 정조(재위 1776~1800) 역시 소중화 타령만 해서는 절대 국운이 융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정조 역시 ‘중국을 배울 수밖에 없다’는 북학파의 의견을 적극 수용한다.

그 무렵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호렵도’에 바로 청나라를 미워했지만, 그런 청나라를 배울 수밖에 없는 이중적인 의식이 숨어있다.

화려한 가마를 타고 길을 나서는 황실 여인들을 그린 ‘호렵도’의 제3폭.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지난해 9월 미국 경매를 통해 구입·환수한 ‘호렵도 8폭병풍’을 18일 오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했다. 이 호렵도는 비단 바탕의 8폭으로 이루어진 연결병풍(전체 길이 392㎝, 높이 154.7㎝)이다. 자문을 맡은 정병모 경주대 초빙교수는 “산수의 표현과 화면 구성이 탁월하며 인물과 동물의 묘사가 생동감 있고 매우 정교하여 호렵도 중에서도 수작으로 평가된다”고 밝혔다. ‘호렵도’는 본래 청나라 황제가 무란웨이창(목란위장·木蘭圍場)에서 사냥하는 장면을 화폭에 담은 그림이다. 무란웨이창은 허베이성(하북성·河北省) 청더(승덕·乘德)에 있는 청나라 황제의 사냥터이다.

‘호렵도’ 중 사냥 장면. 활과 당파(창날이 세 갈래로 갈라진 창의 일종) 등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이 병풍은 폭포를 시작으로 스산한 가을 분위기의 산수를 숙달된 화원 화가의 필치로 묘사한 제1~2폭과, 화려한 가마를 타고 길을 나서는 황실 여인들을 그린 제3폭, 푸른 바탕에 흰 용이 새겨진 복식 차림의 청 황제와 다양한 자세의 기마인물들이 등장하는 제4~6폭, 그리고 호랑이와 사슴을 향해 활을 겨누거나 세갈래 창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사냥꾼들이 역동적으로 묘사된 제7~8폭 등으로 구성돼있다.

정병모 교수는 “특히 제5폭 인물의 옷을 확대해보면 곤룡포처럼 가슴과 어깨에 용이 그려져 있는 청색 가죽옷을 입은 모습에서 청나라 황제임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또 수레(車)를 타고 가는 황제의 여인 행렬이 눈에 띄며, 서양식 입체적인 표현으로 그린 황제 일행도 눈에 띈다. 나발과 동각을 부는 사람들을 비롯해 사냥꾼들의 다양한 모습도 그려져 있다. 마치 풍속화 같다.

다양한 자세의 기마인물들이 등장하는 제4~6폭,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그렇다면 이번에 구입환수된 ‘호렵도’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청나라 황제는 누구일까. 보도자료에는 특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병모 교수는 “건륭제일 가능성이 짙다”고 추측한다. 근거는 무엇일까. 1780년(정조 14년) 여름 정조는 열하(청더·乘德)에서 열린 건륭제의 칠순잔치(만수절)에 전격적으로 축하 사절을 보냈다.

이를 계기로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가 호전된다. 이때 사절단 일원이던 연암 박지원(1737~1805)이 건륭제의 조카 예왕(豫王) 일행의 사냥 장면을 목격한다. 사절단은 또 강희제의 사냥 장면을 그린 그림이 민간에서 매매되는 것을 보았다. 정병모 교수는 “이번에 구입환수한 ‘호렵도’를 그린 화가는 아마도 당대 청나라 황제(건륭제)를 표현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호렵도’에 담긴 민화적 요소. 얼굴과 꼬리는 표범인데, 몸은 호랑이로 표현하고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정조와 건륭제의 연결고리는 또 있다. 정조가 건륭제의 ‘다보격’에 착안해서 ‘책가도’ 병풍을 내걸었다는 것이다. ‘다보격(多寶格)’은 건륭제가 자신의 서재(수방재)에 다양한 고동서화를 진열하고 감상한 여러칸의 진열 공간을 의미한다. 정조는 1791년(정조 15년) 군왕의 분신이자 상징이라는 ‘일월오봉도’ 병풍을 내리고 ‘책가도’ 병풍을 제작·설치했다. ‘책가도’는 책장에 서책을 중심으로 각종 문방구와 골동품, 화훼, 기물 등을 그린 그림이다. 정조는 ‘책가도’ 병풍을 내걸면서 “앞으로 책과 학문으로 세상을 다스리겠다”고 천명했다. 정병모 교수는 “정조가 북학 정책으로 ‘문(文·책가도)과 무(武·호렵도)’의 측면에서 청나라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고 풀이했다.

구입환수된 ‘호렵도’는 궁중화원이 김홍도 화풍으로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물과 옷선의 표현이 김홍도 그림과 약간 다르다.|정병모 교수 제공

또 ‘호렵도’를 처음 그린 화가는 조선의 대표적인 화가로 꼽히는 김홍도(1745-1806?)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홍도의 작품은 서유구(1764~1845)의 <임원경제지>에 기록으로만 남아있다.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호렵도 병풍은 민화풍으로 그려진 것이다.

이번에 돌아온 호렵도는 웅장한 산수 표현과 정교한 인물표현 등에서 수준 높은 궁중화풍, 즉 김홍도 화풍으로 그린 작품이다. 그러나 인물 옷선의 표현이 김홍도 그림과는 약간 다르다. 얼굴과 꼬리는 표범인데, 몸은 호랑이로 표현한 민화의 요소도 담겨있다. 정병모 교수는 “구입환수된 ‘호렵도’는 지금까지 알려진 호렵도 가운데 가장 예술적 완성도 높은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호렵도’는 18일부터 박물관 내 궁중서화실에서 국민에게 공개된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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