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동원 생존자' 얼마 남지 않았는데..정부는 '무관심'
"어르신!"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의 이국언 대표가 정병호 할아버지 댁을 찾았습니다. 올해 정 할아버지의 나이 98세. "이걸 찾느라고 애를 먹었다"며 흰 종이 한 묶음을 꺼내놓으십니다.
노트로 쓰기 위해 잘라낸 달력 종이의 뒷면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었습니다. 한 편의 소설처럼 술술 읽히지만,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80년 전 일본에 끌려가 겪었던 강제동원의 생생한 기록입니다.
태평양이 트여보이는 외진 해변이다. 어뢰 발사기지 구축 공사다. 취사용 연료가 없어 산에 올라 생목을 베어 내리기도 하고…
부대장 가내야마는 우리 조선인이었다. 해군특공전투비행단 기지 활주로 공사다. 밤낮없이 흙과 싸우는 일이다
■ 76년 만에 해방된 '강제동원의 기억'
1924년 10월 광주에서 태어난 정 할아버지는 20살이 되던 해, 일본 가고시마 가노야 해군의 군무원으로 동원됐습니다.
정병호
출생 : 1924년, 광주부 양림동
동원 기간 : 1945.1~1945.8
동원지 : 일본 가고시마
동원 유형 : 군무원
광주에서 함께 동원된 동료들은 분대가 편성되면서 모두 흩어졌고, 다시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일본군 기지 구축 공사 현장에 끌려다니며 고된 노동에 시달린 9개월의 지옥 같았던 시간이 수기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일본의 패전이 확정되고 곧바로 귀향길에 나섰지만 그 또한 쉽지 않았습니다. 한발 앞서 귀향객들을 태우고 시모노새키항을 출발한 부산행 배는 칠흑 같은 밤바다로 침몰했습니다.
무법천지가 돼버렸다. 우리들도 자동으로 해체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큐슈 남단에서 북단까지 노숙하며 도보로 기차로 일주일, 8월 21일 밤 시모노새끼 도착. 어둠 속에 귀국객들로 붐벼 아수라장이다. 다투어 똑딱선을 타고 밤 11시에 출발, 현해탄을 건너는데…
우리들 몸에선 간국이 질질 흐르고 악취까지 풍겼다.
우리 앞에 한 시간 먼저 떠난 배는 침몰했다. 그 날의 참혹한 절규가 이날로 구천에 메아리치고 있으리라. 낱낱이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한 맺힌 슬픈 일들이다.
"우리의 역사는 일본놈 종살이였다"
정 할아버지의 수기는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이런 날이 오리라는 걸 예상이라도 했던 걸까요? 고통스러운 기억을 생생하게 기록한 건 광복 28년이 지난 1973년 10월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반백 년이 다 돼가는 오늘, 할아버지는 집 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져 기어코 기록을 다시 찾아냈습니다. 일제 강제동원 생존피해자 증언록 책자에 자신의 기억이 꼭 담겼으면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할아버지는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아주 훌륭한 수기가 될 것이여" 할아버지는 오랜 소원을 성취한 듯 해맑게 웃어 보였습니다. 취재진은 코로나19 확산세와 피해자들의 감염 우려 때문에 함께 방문하지는 못했지만, 영상을 통해 기분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 "이것이 난가, 요것이 난가" 흐릿한 기억만이라도
이국언 대표가 다음으로 찾아간 91살 정신영 할머니는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생존 피해자입니다. 피해자 중에서는 나이가 적은 편입니다.
정신영
출생 : 1930, 전남 나주
동원 기간 : 1944.5~1945.10
동원지 : 일본 아이치현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
동원 유형 : 근로정신대
1944년 일본 나고야성을 배경으로 찍은 앳된 여자아이들의 단체 사진이 할머니 눈앞에 놓였습니다. 전남 나주에서 동원돼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로 끌려온 아이들을 찍은 일종의 기념사진입니다.
할머니는 딱 한 번 간 적이 있다며 나고야성을 단번에 알아봤습니다. "한국말로는 명고야. 일본말로는 나고야죠(名古屋城)"라고 한다는 것까지 일러줍니다.
이것이 난가. 요것이 난가. 모르겄소.
거기서 사진 찍어가지고 온 걸 정신대 갔다 왔다고 남부끄럽다고 다 없애버렸어, 나는. 불 질러버렸어.
나고야성 사진 속 '오또상'(お父さん. 아버지라는 뜻의 일본어. 기숙사 사감의 호칭)과 다른 일본인 한 명, 한국인 임시교사를 제외한 나머지 24명은 모두 나주에서 동원된 피해자입니다. 이 중 두 명은 1944년 12월에 발생한 도난카이 대지진으로 사망했고, 미쓰비시와 오랜 법정투쟁을 벌여 온 양금덕 할머니(앞줄 왼쪽에서 7번째)도 있습니다.
할머니는 안경을 거듭 고쳐 쓰며 사진을 이리저리 한참을 살펴봤습니다. 겨우 자신의 옛 모습을 짐작이라도 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뒷줄의 여자아이를 짚었다 말기를 반복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올 때 챙겨온 사진들은 정신대였다는 게 부끄러워 모두 태워버렸습니다. 흐릿해진 할머니의 기억만이 강제동원 피해의 증언이 될 수 있는 이유입니다.
■ 해마다 평균 '1,500명' 사망, 3년 후엔 아무도 없다는 계산
시민모임은 광주전남지역에 생존해 있는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돕는 시민단체입니다. 양금덕 할머니 등의 기나긴 법정 다툼을 이끌며 언론에도 자주 등장했습니다.
시민모임은 근로정신대에서 범위를 더 넓혀 노무 동원, 군인 동원까지 모든 유형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만나 증언을 기록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2018년부터 2년 동안 구술채록을 진행한 강제동원 피해자는 31명입니다. 90대 초반부터 이미 100세를 넘긴 분들도 있습니다.
면담을 한 차례 마친 정병호 할아버지, 정신영 할머니를 최근에 다시 찾은 건 구술 자료의 이용 동의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그 사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분들이 많습니다.
구술 대상자 정보를 기록한 문서에 생존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비고란을 새롭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물론 연락이 닿아도 찾아올 필요가 없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요양병원에 계시는 분들도 많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면담을 시도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강제동원 증언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는 이제 없을지도 모릅니다.
31명, 여기까지가 시민모임의 한계였습니다. 31명의 연락처는 2015년 광주광역시가 주최한 '강제동원 사진전' 당시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확보해 둔 겁니다.
민간단체에서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건 생존 피해자가 몇 명인지 정도입니다. 행정안전부는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피해자들에게 의료지원금 명목으로 매년 80만 원을 지급합니다. 즉, 국외 강제동원 생존 피해자 수는 그 해 의료지원금이 몇 명에게 지급됐는지를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망자가 얼마나 늘었는지도 계산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행안부의 지난해(2020년) 의료지원금 지급 대상은 3,140명이었습니다. 2019년 4,034명에서 900명 가까이 줄어든 숫자입니다.
지급 인원이 가장 많았던 2011년부터 2020년까지 평균 사망자 수를 계산해봤더니 해마다 1,556명이 줄었습니다. 올해 지급 예정 인원은 2,400명입니다. 일본 땅으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던 740명이 지난 1년 동안 또 사라진 겁니다.
이대로라면 오래 버텨도 3~4년 후에는 아무도 없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 증언 확보 그만둔 정부, 개인정보도 막혀
그렇다면 정부 차원의 구술 증언 기록은 잘 되고 있는 걸까요?
물론 과거 '피해 조사'가 이뤄졌기 때문에 그 결과를 바탕으로 의료지원금은 지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2005년 당시에는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진행된, 말 그대로 '피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본으로 끌려가 구체적으로 어떤 생활을 했고, 그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강제동원 전과 후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피해자들의 감상과 주관은 결여돼 있습니다. 진상규명을 위한 증언, 역사적 사실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라고 보기에는 한계가 큽니다.
그마저도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2005년부터 2015년까지 2,021건을 진행한 후 중단됐습니다. 2015년 생존자는 만 명가량이었습니다.
시민모임이 만난 31명 중에서도 정부 차원의 구술채록에 참여했던 이는 단 한 명뿐이었습니다.
시민모임과 같은 민간단체들이라도 피해자들을 더 만나볼 수 있게끔 행안부가 최소한의 정보를 공개할 수는 없을까요? KBS는 지난해 광복절에 행안부가 '개인정보 유출'을 이유로 산하기관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과 역사관에 생존 피해자들의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업무태만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취재후] 강제징용 진상규명보다 개인정보가 중요하다고?
이런 상황에서 시민모임 같은 민간단체에까지 피해자들의 개인정보를 제공해줄 리는 만무합니다. 물론 개인정보의 악용을 걱정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중대한 역사의 기록을 위해서라면 다른 방법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 대표는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채록 사업이 개인정보보호에 막혀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며 사실상 끝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개인정보라고 하는 외피만을 적용한다면 정보가 보호될지는 모르지만 역사의 창고에 가둬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피해자들은 누군가가 피해 사실을 귀담아 들어주기를 바라거나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 70년 넘게 지속적으로 끈을 놓지 않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직도 억울함이 남아 있다고 느끼지 않을까요? 이런 상황은 일본 입장에서는 매우 좋은 것입니다. 진상 규명이나 학술 연구 활동에 우리 스스로 족쇄를 걸어서 역사 계승의 통로를 끊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고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 이미 늦어버린 '강제동원 기록'
혹시 피해자들이 노출되기를 꺼리는 거 아닐까요? 글쎄요. 시민모임이 만난 최상영, 유영휘 할아버지는 벌써 오래전에 강제동원 경험을 기록한 자서전을 만들어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앞서 소개한 정병호 할아버지처럼 기억을 더듬어가며 수기를 작성하고, 건네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생존자가 더 있을지도 모릅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지난해 말 홈페이지에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채록' 희망자 모집 공고문을 개재했습니다. 정부 차원에서 중단된 구술채록 사업을 재개해 관련 증언과 생애 구술을 기록화, 보존하겠다는 겁니다.
진행 상황을 물어봤습니다. 지난해 생존자 기준 3,100명 모두에게 우편을 발송했고, 벌써 200명 넘는 분이 신청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달라질 건 없습니다. 재단의 정규사업으로 반영되지 못해 일회성 사업으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구술채록이 가능한 인원은 2~30명 정도에 불과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계획대로 3월에 시작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예산은 취소된 해외 사업을 전용해 마련했습니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이마저도 어려웠다는 얘깁니다.
재단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채록의 시급성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문헌 자료에 구술 증언이 더해져야 역사적 사실로서 신뢰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행안부 국정감사에서도 이 문제가 지적돼 더욱 급해졌습니다.
하지만 남아 있는 피해자들의 시간과 인원, 정부가 지금까지 보인 의지와 여건 등을 고려했을 때, 정부의 구술 증언 확보 사업이 박수를 받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사례로 소개한 정병호 할아버지, 정신영 할머니의 구술채록 과정 중 일부를 'KBS광주' 유튜브 콘텐츠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랜선필진] 일제 강제동원 생존 피해자를 찾습니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지종익 기자 (jigu@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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