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죽이고 한지를 태웠다..김민정 개인전 '타임리스'
'Timeless' 새 연작 한국서 첫 선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알고 보면 놀랍다. '어떻게...이럴수가'라는 자문이 절로 나온다.
누르스름한 색감. 멀리서 보면 드로잉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치밀함에 깜짝한다. 얇은 한지들이 모여 갈색의 리듬감을 전하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포물선을 만들고 4각 입체로 변신하며 조각처럼 보이기도 한다. 단색의 한지를 수직 혹은 수평으로 길게 자르고 그 가장자리를 태우고 겹쳐 완성했다.
"코로나 시대 딱 맞는 작품이죠."
17일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 김민정은 "할 일이 없어서...시간이 많아서"라며 웃어 제쳤다.
'한지 향불' 회화로 유명한 김민정(59)은 프랑스와 미국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해 프랑스에서 내한했다.
2017년 갤러리현대에서 전시 이후 4년만에 다시 온 작품은 작가의 명상적이면서 더욱 깊어진 작업 태도를 전한다.
얇은 한지를 잘라 촛불에 태우고 손바닥으로 쳐서 끄기를 반복했다. "하다보면 생각이 없어져요. 아무 생각도 안나요."
수많은 종이와 만난 손바닥은 지문이 없어질 정도로 반질반질해졌다. 한지와 자신을 가해하며 쳐낸 시간은 '비움과 채움'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시간과, 나와의 싸움. 결국 승리는 작가 자신이다. 끝난 작품이 말해준다. "잘 나왔다."
이번 전시 제목 'Timeless(타임리스)'는 한국에서 처음 선보이는 연작이다. ‘비움의 채움’이라는 순환적 개념을 녹여 냈다. 반복적이고 노동 집약적인 수작업은 김민정의 작품 세계를 복합적으로 아우른다.
'타임리스'는 윤회, 음(陰)과 양(陽), 비움과 채움 등의 동양 철학적 사유와 깨달음을 동시대 미술의 언어로 시각화하려는 작가의 의지를 드러낸다.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디는 한지의 강인함과 아름다움과 수행을 하듯 호흡을 가다듬어 한지를 불로 태우는 행위, 그 조각을 섬세하게 배열하는 작가의 내공이 스며있다.
한지를 촘촘하게 쌓은 'The Room'은 명상의 어느 단계에 이르면 영혼이 육체를 이탈해 공간을 부유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이론에서 착안한 작품이다. 무한 증식하듯 화면에 반복적으로 쌓인 단순한 패턴의 한지 조각이 옵아트와 같은 시각적 환영을 만들며 미묘한 뉘앙스의 공간감을 형성하는 작업이다.
'The Water' 연작은 한곳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물의 생태와 무한한 특성을 은유한다. 어떤 불가항력에 의해 묶인 듯한 무채색의 그러데이션 곡선이 폭발적 에너지를 발산한다.
'Nautilus'는 ‘살아 있는 화석’인 앵무조개의 외양에서 영감을 받았다. 중심에서 방사형으로 뻗어 나오며 화면을 빼곡하게 채운 단색의 한지 조각의 치밀한 층위가 압도적이다. 아름다움의 이상인 황금 비례와 영원한 시간성을 암시한다.
먹의 농담을 섬세하게 조절하며 완성하는 'Mountain' 연작은 전통 산수화를 동시대 추상회화의 맥락과 영역으로 확장하는 작품으로, 영국 대영박물관에도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번 전시를 기념해 발간한 도록에는 전시 출품작을 포함해, 김민정 작가의 대표작 40여 점을 수록했다. 권영진 미술사학 박사는 에세이 '김민정, 물과 불의 한지를 겹쳐놓다'에서 김민정 작가와 작품을 한국 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재조명하고, ‘동양화’, ‘한지’, ‘여성 작가’를 키워드로 그의 한지 콜라주가 지닌 동시대 미술의 맥락과 의미를 분석했다.
또 세계적인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와 김민정 작가의 온라인 대담을 옮긴 인터뷰에서는 작가의 성장 배경과 작업의 방법론, 삶의 태도와 관심사, 향후 계획 등을 종합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전시는 3월28일까지.
'한지 회화' 작가 김민정은?
지난 20여 년간 이탈리아, 스위스, 중국, 영국, 미국, 이스라엘 등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2012년 로마 마르코 현대미술관, 2017년 싱가포르 에르메스 파운데이션, 2018년 화이트 큐브, 2019년 랑겐 파운데이션, 2020년 힐 아트 파운데이션 등 전세계 유수의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국내에서는 2015년 OCI미술관 개인전 '결(Traces)'전을 통해 처음으로 주목 받았다. 2017년 갤러리현대 개인전 '종이, 먹, 그을음: 그후', 2018년 광주시립미술관에서 해외 유명 작가 초대전 '비움과 채움'을 열었다. 2015년 장-크리스토프 암만(Jean-Christophe Ammann)이 기획해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 중 카보토 궁에서 열린 개인전 '빛, 그림자, 깊이'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고, 2004년과 2018년 광주비엔날레에도 참여했다.
작품은 이탈리아 토리노의 폰다치오네 팔라초 브리케라시오, 덴마크 코펜하겐의 스비닌겐 미술관, 영국 대영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최근 영국을 대표하는 아트북 출판사 'Phaidon'사에서 자사 에디터들이 뽑은 '세계 최고의 현대 미술 드로잉 100인'에 한국 작가로는 유일하게 선정됐다.
☞공감언론 뉴시스 hyun@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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