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사찰 없다’는 정권의 도청

배성규 논설위원 2021. 2. 18.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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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국정원장이 16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왼쪽부터 박정현 2차장,박 원장, 김선희 3차장. /이덕훈 기자

미 연방수사국(FBI) 에드거 후버 전 국장은 1924년부터 고위층 사찰 정보를 무기로 미 정계의 막후 실력자로 행세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나치 독일의 침투를 막기 위해 FBI에 도청을 허용해 그럴 수 있었다. 그는 루스벨트에게 정치인 사찰 정보를 제공해 총애를 받았다. 정치인과 시민운동가에 대한 불법 도청 사실이 폭로됐지만 끄떡없었다. 미국 요인들에 대한 막대한 도청·사찰 정보 덕분이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무려 48년간 FBI 수장 자리를 지켰다.

▶한국에도 도청이 있었다. 김영삼 정부 때는 ‘미림팀’을 만들어 총리, 장관, 청와대 수석, 여야 대표 등을 도청했다. 미림팀장 집에서 압수된 도청 테이프만 274개였다. 이는 ‘M보고’라는 이름으로 안기부장과 차장에게 보고됐다. 당시 미림팀장은 “아침에 청와대에 보낼 (도청) 보고서를 만드느라 손톱이 노래져 빠질 지경이었다”고 했다.

박지원 국정원장이 16일 국회에서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는 불법 사찰이 없었다”고 했다. 이명박 정부 때 국정원이 국회의원 등에 대해 작성한 문건에 비하면 김대중 정부의 도청은 훨씬 심각한 문제다. 그런데 “사찰이 없었다”고 한다. 이 정권 사람들은 거짓을 당당하게 말한다.

▶1999년 김대중 정부는 국가정보원·정보통신부·법무부 합동으로 신문 광고를 냈다. ‘국민 여러분 안심하고 통화하십시오! 휴대전화는 감청이 안 됩니다.’ 당시 야당에서 휴대전화 도청에 대한 의혹을 거세게 제기하자 장관들이 단체로 나와 기자회견도 했다. 하지만 2003년 국정원의 휴대전화 무더기 도청 사실이 폭로되면서 새빨간 거짓말임이 탄로 났다. 그 도청 장비를 폐기하는 데 트럭을 동원해야 할 정도였다.

▶당시 국정원은 전직 대통령부터 여야 정치인, 공직자, 언론인, 경제인, 시민 단체와 노조 간부까지 1800명을 도청했다. 주요 전화국의 중계 통신망에 감청 장비를 연결해 모든 통화를 감시했다. DJ 정부의 햇볕 정책을 비판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를 수시로 도청하고, 정치권 인사의 사석 발언을 문제 삼아 겁을 줬다. 이 ‘통신 첩보’는 매일 사각형 봉투에 담겨 국정원장에게 보고됐다. 이 사건으로 임동원·신건 전 원장과 김은성 전 차장이 구속돼 유죄를 선고받았다. 노무현 정부에선 국정원이 2007년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 친인척의 부동산 정보를 열람했다. 사찰이었다. 문재인 정부에선 탈원전 반대 단체와 한수원 노조에 대한 동향 보고서를 작성했다.

▶박지원 국정원장이 16일 국회에서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는 불법 사찰이 없었다”고 했다. 이명박 정부 때 국정원이 국회의원 등에 대해 작성한 문건에 비하면 김대중 정부의 도청은 훨씬 심각한 문제다. 그런데 “사찰이 없었다”고 한다. 이 정권 사람들은 거짓을 당당하게 말한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건 좀 너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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