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왜 대통령 자신의 명운은 걸지 않나
국민정서 자극해 선거에 이용하고
잘못은 반성 없이 관계복원 나서
무책임한 정치공학 국민이 알게 됐다
“남북은 많은 문제에서 한배를 타고 있다”는 대통령 신년사처럼 이 땅에도 문재인 대통령이 심어놔서 얽히고설켜 버린 콩 줄기가 많다. “빨리 관계를 복원해야 한다”고 청와대가 밝힌 한일관계도 그중 하나다.
신년회견에서 문 대통령은 “2015년도 양국 정부 간 위안부 문제 합의가 공식 합의였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돌연 입장을 바꿨다. 이번 3·1절 기념사에 위안부 피해자와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의 전향적 해결책을 담는다는 보도도 나왔다. 문 정권 출범 때부터 입이 아프게 양국관계 개선을 촉구해온 ‘토착왜구들’로선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한일 합의가 나온 직후 “우리는 이에 반대하며 국회 동의가 없었으므로 무효”라고 선언했던 이가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였다. 강제징용 상고심이 진행 중이던 2017년 9월 문 대통령은 “대법원 판례로도 징용자 개인의 민사적 보상 청구권은 인정된다”고 결론을 제시했다. 대통령의 복심 양정철은 ‘한일 갈등이 2020년 총선에서 여당에 긍정적’이라는 민주연구원 보고서를 돌려 과거사와 외교까지 선거에 이용하는 정권본색을 드러냈다.
이 모든 것을 기억하는 국민 앞에 문 대통령은 “(문제 해결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하고 있는 중에 위안부 판결 문제가 더해져 곤혹스럽다”고 했다. 7월 도쿄 올림픽이 열리면 남북 대화와 북-미 협상 자리에 팥죽을 잔뜩 쑤어낼 작정이었는데 웬 콩이냐는 소리로 들린다.
사인(私人) 간에도 자기가 콩 심은 걸 인정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으면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16일 문 대통령은 신임 국토교통부 장관에게 “주택 가격과 전월세 가격을 조속히 안정시키는 데 부처의 명운을 걸어주길 바란다”고 했다.
2·4대책 전까지 24번이나 투기 억제라는 명분으로 공급억제책을 쏟아낸 대통령은 딴 나라 대통령인 모양이다. “부동산 문제는 자신 있다”던 문 대통령이 왜 사유재산 침해로 위헌 소지가 있는 대책에 자기 명운은 안 걸고 국토부의 명운을 걸라는 건지 무책임하다.
문 대통령이 장관들에게 명운을 걸라던 일이 또 한 번 있다. 2년 전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클럽 버닝썬, 고 장자연 씨 사건 의혹에 대해 “검찰과 경찰의 현 지도부가 조직의 명운을 걸고 철저히 수사하라”고 구체적 사건을 콕 찍어 지시한 일이다. “사회 특권층에서 일어난 이들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지 못하면 정의로운 사회를 말할 수 없을 것”이라는 대통령 발언은 지당하다. 그렇다면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월성원전 조기 폐쇄 사건에 대해선 왜 검찰 조직까지 흔들면서 진실 규명을 막는지도 말해야 한다.
그 발언 닷새 뒤 김학의 출국을 막으려고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 이용구 법무차관 등 현재 검찰과 법무부 실세들이 불법 개입한 정황이 최근 드러나고 있다.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고 해도 출국금지처럼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은 적법 절차에 따라야 했다. 지배세력이 법을 지키는 것이 법의 지배이고 법치주의다. 법치주의가 막히면 선진국 진입도, 성장도 막힌다고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지적했다. 결국 공소시효까지 무시한 문 대통령 말씀 때문에 권력기관들이 불법을 불사하고, 공직자가 원전 관련 증거를 말살하고, 감사원장을 집 지키는 개 취급하는 방자한 일이 자칭 민주개혁정부에서 버젓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문 정권의 정치적 술수를 이제 다수 국민이 알아버렸다는 사실이다. 선거 코앞에 불거진 전임 정권의 민간인 사찰 의혹쯤엔 놀라지도 않는다. 집권세력엔 적용되지 않는 선택적 정의에 분노하고, 치솟는 집값 때문에 절망하고, 이웃 나라와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할 수 없게 된 데는 문 대통령의 잘못이 크다.
스스로의 명운을 걸고 잘못을 바로잡아야 할 사람은 문 대통령 자신이다. 대통령이 죄 없는 정부 조직만 명운을 걸라는 바람에 대한민국 법치주의도, 민주주의와 경제도 무섭게 흔들리고 있다.
김순덕 대기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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