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 이마에 뿔만 안 달리면 다 보통 사람
[경향신문]
“막내까지 학교를 보내고 나니 좀 심심해서…”라고 박완서는 얼버무리듯 대답했다고 한다. 1970년, 다섯 명의 자녀를 둔 전업주부가 왜 마흔이라는 늦은 나이가 되어서야 소설을 쓰기 시작했냐는 질문을 받고서다. 그렇다면 심심풀이로 소설을 쓴다는 거냐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하지만 40대 기혼 여성으로서 “막내까지 유치원에 들어간 바로 그 당시가 다시 뭔가를 시작하기에 가장 적합한 때”였다는 건, 결혼 후 줄곧 이어진 육아 및 가사의 부담으로부터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지자 비로소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는 뜻일 것이다.
누구든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는 희망을 전해주는 일화일까. 아니면 뛰어난 재능은 어느 시기든 세상으로 삐져나온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화일까. 어느 쪽이든 박완서는 예외적 인물의 관념이나 정서가 아니라 평범한 중산층의 생활과 욕망을 문학의 무대 위로 올렸다는 평을 받곤 한다. 그런데 평범한 사람이란 과연 누구일까? 너무 부자도 아니고 너무 가난하지도 않은, 너무 똑똑하지도 너무 멍청하지도 않은 평균치의 사람? 아니면 박완서가 어느 산문에 썼듯 ‘이마에 뿔만 안 달리면 다 보통 사람’(<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일까?
“그의 욕이 내 생활을 꿰뚫고 내 행복을 간섭하고, 그의 욕이 이 기름진 시대를 동강내어 그 싱싱한 단면을 보여주며 이것은 허파, 이것은 염통, 이것은 똥집, 이것은 암종, 이것은 기생충 하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게 하고 싶다.” 초기작 ‘지렁이 울음소리’에서 안정적이고 부유한 남편과 함께 삼남매를 키우며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나’는 정작 자신의 행복을 믿지 못하고 이렇게 말한다. 우연히 만난 학창 시절의 욕쟁이 국어 선생님의 입에서 참고 있을 욕설을 듣고 싶다는 기이한 욕망에 시달리는 것이다. 행복한 일상에 늪처럼 고여 있고 수초처럼 흐느적대는 음습한 권태와 조용한 비명은 마치 지렁이 울음소리 같다.
작가가 남편과 아들을 한 해에 잃은 뒤 집필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에서 화자는 민주화 투쟁으로 죽은 아들이 떠올라 고통을 견딜 수 없을 때마다 은하계의 천문학적인 규모와 수치를 주문처럼 외운다. 그에 비하면 한낱 인간의 인생은 모래알처럼 사소해지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터져 나오는 울음 앞에서야 그런 주문 따위 아무것도 아닐 테지만, 그런 안간힘으로 모진 불행을 겨우 참고 버티기도 한다.
우리 모두 보통 사람인 까닭은 이마에 뿔이 안 달렸기 때문이기도 하고, 가진 것과 무관하게 평등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그 누구도 행복과 불행의 알 수 없는 함수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화사해 보이는 행복에도 서늘한 불행의 기운이 촘촘하게 스며있고, 아무리 절벽 같은 고통에도 징글징글한 생명력이 끈질기게 붙어있는 것이 보통의 인생일지. 사는 동안은 지렁이 울음소리와 은하계 주문 사이를 끝없이 오가는 왕복을 어쩔 수가 없겠다고, 지난달 타계 10주기를 기념하여 잇따라 출간된 박완서의 훌륭한 소설과 산문을 내내 곁에 두고 읽으며 이상한 위로를 받았다.
인아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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