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이대로 멈출 순 없다
[경향신문]
시청자가 세계관을 선택할 수 있는 드라마도 나올까? 지금도 구간마다 시청자의 선택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인터랙티브형 드라마가 있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시청 전에 배제하고 싶거나, 강화하고 싶은 설정을 미리 선택하는 형식이다. 예를 들어 ‘로맨스 제거’ 버전을 선택한다면 모든 종류의 로맨스가 금지되어 사랑이 싹트려 할 때마다 등장인물이 죽을 것이다. 사람들이 오로지 자산관리에만 열중하고, 드라마의 결말을 보려면 추가 결제를 해야 하는 ‘자본주의 강화’ 버전, 남자들이 저임금 가사노동에 시달리다 이유 없이 벌을 받는 ‘난폭한 페미니즘’ 버전을 고를 수도 있다. 간단한 선택만으로 나의 신념을 확인하고, 다른 종류의 가치관을 체험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물론 동시에 분열과 논란을 초래하겠지만….
나에게 세계관을 고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주저없이 ‘스테레오타입의 악녀가 등장하지 않는 버전’을 선택할 것 같다. 나는 비명을 지르고, 분노로 복수를 다짐하는 악녀들이 질린다. 그들은 대부분 치정으로 살인을 계획하고, 질투에 눈이 멀어 친구의 남자를 뺏고, 자식을 버리는 비정한 모성의 엄마, 아이를 학대하는 냉혹한 계모로 등장하는데 하나같이 ‘감정적이고’ ‘질투심이 많은’ 편협한 여성성을 지녔거나 천륜이나 다름없는 모성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 이렇게 왜곡되고 강요된 여성의 자질과 역할은 권선징악의 통쾌함 속에 녹아 악행과 함께 징벌의 대상이 된다. 쾌감의 도구로만 사용되는 악녀의 존재는 그래서 늘 부자연스럽고 여성혐오적이다.
그렇다면 ‘악녀’ 캐릭터는 질투와 시기를 거두고 거창한 포부와 건전한 야망을 지녀야 여성혐오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은 웹툰 <이대로 멈출 순 없다>가 던지는 질문이다. 만화의 배경인 ‘정문여상’은 어른들이 통제를 포기할 정도로 품행이 불량한 학생들이 모인 학교다. 진로를 계획하고 창창한 앞날을 꿈꾸기보다는, ‘우린 망했고, 화났으니 건들지 말라’는 정서를 공유하며 흡연과 음주는 물론 오토바이를 타고 패를 지어 싸우다 학교를 뒤집어엎는다. 그러나 말리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일찌감치 사회에서 ‘악’으로 격리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이 모두 악녀나 다름없는 이 만화는 악녀를 선한 주인공을 돋보이게 만드는 데 사용하거나, 권선징악의 제물로 희생시키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을 교화하여 가르침을 주거나, 성장시키려 드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이 여자가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뿐이다. 분노의 이유는 성장 배경과 트라우마일 때도 있지만 가끔은 그저 ‘너무 더운데 에어컨이 나오지 않아서’ ‘너무 배고픈데 급식이 부실해서’가 되기도 한다. ‘악녀’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갖고 있는 보편적인 악의와 그 사소한 근원을 추궁하는 것이다. 만화는 ‘악녀’를 구성하는 진부한 설정들을 배제하고도 여성들만의 사회와 그들이 가진 폭발하는 감정들을 밀도 있게 그려낸다. ‘악녀’라는 도식에서 벗어나면 더 많은 ‘악녀’를 그릴 수 있다는 해법의 아이러니인 셈이다.
‘이 여자를 욕하라!’는 의도로 만들어진 ‘악녀’ 프레임은 실재하는 여성의 죄를 물을 때 불필요한 형벌로 작용한다. 죄를 지은 여성이 ‘악녀’로 규정될 때 사람들은 죄를 지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의 나약한 여성성에 균열을 내고 실패한 욕망을 응징하며 쾌감을 느끼려 든다. 이것은 ‘죄를 벌한다’는 당위에 가로막혀 ‘악녀’라는 도식이 만들어낸 여성 전체에 대한 모멸을 묵인하게 하고, 많은 여성들로 하여금 비틀린 여성성을 도덕이라 착각하게 한다. ‘악녀’를 응징하는 쾌감을 경계하고, 더 다양한 성격의 여성들을 그려내고 쓰고 말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이 착각에 의해 멈춘다면 그보다 억울한 일은 없을 것이기에.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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