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수업시간 토막나고 쉬운 수학만 가르치면서 AI시대 강조하는 이상한 나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와 기초과학학회협의체가 이달 17일 개최한 ‘수학·과학교육과정 개정에 대한 정책 포럼’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잦은 교육과정 개정이 교사와 학생을 피로하게 만들고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강조하는 학생 참여형 수업을 실행하기에는 수업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미래 지능 정보 사회에 꼭 필요한 행렬, 벡터 같은 수학 개념은 수업 내용에서 빠져있고 학생들의 자율권을 보장을 위해 만든 선택 과목 제도가 성취도 하락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고 꼬집었다.
이날 ‘수학 내용 재구조화 버퍼링!’을 주제로 발표를 맡은 김화경 상명대 수학교육과 교수는 한국의 초·중·고등학생의 수학 수업 시간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에 비해 훨씬 낮다고 지적했다.
OECD가 2019년 발간한 ‘교육 백서’를 보면 한국 중학교 3학년의 1년간 수학 수업 시간은 평균 93.5시간이다. 반면 OECD 회원국의 중학교 3학년은 평균 122.4시간이다. 이 차이는 학년이 낮아질수록 커져 한국 초등학교 1학년의 연평균 수학 수업 시간은 85.3시간, OECD 회원국의 경우 152.1시간이다. OECD의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2018년 진행한 설문 조사에서는 고등학생은 1주에 학교에서 수학을 배우는 시간이 185.7분이고 OECD 회원국의 경우 평균 238.8분인 것으로 나타났다.
김 교수는 "그릇이 넓어야 필수 영양소가 풍부한 음식과 맛있는 음식을 담을 수 있는데 수업 시간이 적으면 교육과정에 많은 내용을 담기 어렵다"며 "한국 학생이 수학 공부를 많이 하지만 공교육이 제공하는 수학교육 시간은 굉장히 적은 편"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수학 교육과정을 재구조화해야 한다며 그 방편 중 하나로 개별 수학 지식보다 핵심 개념을 중심으로 내용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규칙성과 중학교에서 배우는 문자와 식, 함수를 모두 ‘변화와 관계’로 통일하는 식이다. 또 수학을 기반으로 한 정보화 소양을 기르려면 행렬, 벡터, 알고리즘을 배워야 하고 데이터를 수집·분석하는 소양과 공학 도구의 활용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프랑스 수학 교과서를 보면 첫 번째 단원이 알고리즘과 프로그래밍이고 다른 단원에서도 알고리즘이 종종 등장한다"며 "인공지능에 꼭 필요한 행렬과 벡터는 적정한 학습 수준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홍창섭 경희여고 교사는 잦은 교육과정 개편으로 인해 교사들이 겪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실제로 국내 교육과정은 1945년부터 1982년까지 약 10년 단위로 바뀌었지만 1987년부터 다음 교육과정이 나오기까지의 시기를 살펴보면 5년, 5년, 10년, 2년, 6년, 7년이다. 교육과정이 자주 바뀌다보니 학생들은 새로운 교과서에 적응하는 사이 다시 교육과정이 바뀐다.
홍 교사는 "학생들의 수준을 보고 교과서를 집필하기보다 아이디어 수준에서 집필하는 느낌을 받았다"며 "정치, 정책적 이슈에 따라 교육과정을 바꾸기보다 외국처럼 10년 정도의 주기로 교육과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홍 교사는 학생의 선택권을 높이기 위해 도입한 선택 과목 제도 역시 특정 과목에 편중되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홍 교사는 정시가 확대되면서 확률과 통계, 미적분, 기하 중 한 과목만 선택하는 학생이 늘어나고 학원가에서는 어려운 미적분보다 공간 벡터가 빠진 기하를 선택하도록 유도한다. 이에 따라 실용 수학, 수학과제 탐구, 인공지능 수학은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 이뿐 아니라 교사들이 선택 과목을 가르치기 위한 학습 자료와 연수가 부족해 질 좋은 수업을 하기도 어렵다.
홍 교사는 "교육과정이 아무리 뛰어나도 학교 현장에 적용할 수 없다면 학생들이 과목을 선택하지 못하거나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다"며 "고교학점제를 도입하려면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하고 운영할지 세밀하게 생각해고 정시를 강화하는 대입 제도와 상충되지 않는지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 과학도 수업 시간 부족하고 입시에 유리한 과목만 선택
정대홍 서울대 화학교육과 교수는 ‘고교학점제 체제에서 과학계의 바람과 선택은?’을 주제로 발표했다. 정 교수는 먼저 공부할 내용을 줄여도 학생들은 그만큼 선행학습을 하기 때문에 학습 부담은 줄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 학생들의 과목 선택권이 성취도를 낮추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고등학교 때 화학1, 화학2를 공부하고 화학과에 진학해야 하는데 입시를 위해 화학2 대신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는 지구과학2를 선택한다"며 "학생은 좋은 등급을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대학 입장에서는 절반만 공부하고 온 셈"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과학 교육계, 기술계, 학생, 학부모, 시민단체를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과학에 대한 학생들의 흥미를 높이려면 탐구 실험 중심의 수업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강조했다. 현재 과학교과서를 살펴보면 1쪽은 개념 설명이 실려있고 나머지 한쪽에는 개념을 확인하는 간단한 탐구 실험이 실려있다. 정 교수는 우리가 기대하는 탐구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실험이 아니라고 평가했다.
정 교수는 "싱가포르, 캐나다, 미국, 호주는 교과서와 별도로 탐구를 배울 수 있는 워크북이 있다"며 "한국도 지리과 부도, 수학익힘책처럼 탐구를 잘 지도할 수 있는 워크북을 활용해야 하는데 교과서 하나에 다 넣으려고 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경식 잠신고 교사는 2009 개정 교육과정에서 물리1 과목의 교과서에 비해 2015 개정 교육과정의 물리1 교과서는 100쪽 넘게 줄었다고 지적하며 결국 교과서에서 자세한 설명이 사라지고 교사 의존도가 높아졌다고 분석했다. 또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강조하는 학생 참여형 수업을 실행하기에는 과학 수업에 할당된 시간이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남 교사는 "물리1, 화학1, 생물1, 지구과학1 조차 모든 내용을 가르치기가 벅차다"며 "과학 수업 시간을 줄이지 말고 학생들이 학기 단위로 끝낼 수 있는 수준의 교육과정 개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행사를 지켜 본 과학계 관계자는 "인공지능(AI)을 비롯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교양으로서의 수학 지식을 미래 시민들인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하지만 교육부가 수학과 과학 교과과정을 주도하고 있어 과학계나 수학계 전문가들의 의견이 원천적으로 차단돼 있다"며 "수업 부담을 줄이겠다는 논리로 다음 세대의 시민 사회에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교양과 지식의 전달이 차단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과기정통부 산하기관 관계자는 "정부가 나서 인공지능과 수학 교육 강화를 외치고 있지만 정작 과기정통부 장관이 미래 인재 양성에 필요한 과학과 수학 교육에 필요한 조치에 대해 교육부 눈치를 보고 아무런 말 한 마디 할 수 없는 구조인 게 한국의 현실"이라며 "현재의 틀을 바꾸지 않는한 한국의 과학과 수학 교육의 학력 저하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우현 기자 mnch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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