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지만, 아프기도 했던..여긴 '혼종의 바다'
[경향신문]
중국·일본·서양인이 만든 ‘조계’
인천 내 ‘이국적 정체성’ 만들어
제각각인 듯하면서 서로 이어져
막스 터블스는 1886년 한국에 왔다. 미국 하퍼스 매거진 통신원이었다. 서울 사동(寺洞, 현 낙원동) 민가에 머물다가 천연두에 걸렸다. 옆방 조선인 아이에게서 옮았다고 한다. 입국한 지 한달 만에 사망했다. 기사 한 건 쓰지 못했다. 삶과 죽음을 가른 계기가 하나 나온다. 일본을 경유할 때 천연두 재접종을 거부했다. 그의 죽음 전후 과정에 한국 근대사에 기록을 남긴 외국인들이 등장한다.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호러스 뉴턴 알렌이 치료했다. 장례 예배를 집전한 목사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다.
‘한국에서 죽은 최초의 외국인 기자’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한국을 최초로 방문한 체코인이다. 체코 외교부 홈페이지에 ‘한국을 여행한 7명의 체코인 이야기-제2차 세계대전 이전 한국을 찾은 그들의 여행담과 한국에 대한 생각’이라는 제목의 글(한국어와 영어)이 있다. 이 글은 “막스 터블스는 보헤미아는 물론 세계 어디에도 한국을 알리는 데 전혀 기여한 바가 없지만, 한국 땅에 발을 디딘 최초 보헤미아인으로서 한국-체코 관계사에 한 획으로 남은 것은 분명하다”고 적었다. 미국으로 이민 가 참여한 샌프란시스코 보헤미안 클럽에서 <악마의 사전>으로 유명한 앰브로즈 비어스와 교류한 기록도 남았다.
터블스의 짧은 한국 체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인천이다. 제물포항으로 들어왔다. 인천외국인묘지에 묻혔다. 개항장 인천에 한 보헤미안의 이야기도 덧댈 수 있을 듯하다. 인천외국인묘지도 개항기의 일단을 드러낸다. 60기 중 신원을 확인한 50기(1기는 합장) 피장자의 국적은 주로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다. 호주와 스페인 출신이 각각 1명이다. 해군, 해관원, 선교사, 상인들이 대다수다. 북성동에 있던 묘지는 청학동을 거쳐 2016년 인천가족공원으로 옮겨졌다. 중국인 묘지(淸國義地·청국의지)와 일본인 묘지도 지금 이곳에 이장됐다.
이들 묘지는 개항기 인천의 조계(租界)를 그대로 옮긴 듯하다. 인천의 조계는 부산이나 목포, 군산 같은 일본 중심의 그것과 달랐다. 인천은 청국 조계와 일본 조계, 서양인들이 밀집한 ‘각국 조계’로 나뉘었다. 조계는 1883~1914년까지 존속하며 국제적이고, 이국적인 혼종의 정체성을 만들었다.
9일 개항장 거리(incheonopenport.com)를 찾았다. 인천 최초의 가톨릭 건축물인 답동성당에서 출발해 각국 조계지 계단과 자유공원을 거쳐 차이나타운 쪽으로 향했다. 그 뒤 일본풍 거리로 이동했다. 일정을 길게 잡아도 하루 정도 온전히 걸어 다니면 될 거리다. 지난해 시범운영을 거친 인천시는 올해 중 ‘개항장 셔틀버스’를 운영한다.
각각의 조계지는 저마다 특색이 있다. 각국 조계지 계단 부근엔 서양식 건축물들이 많다. 인천세관에 근무하던 서양인들이 서양주택을 지었다. ‘맥아더 동상’으로 유명한 자유공원도 최초의 서구식 공원으로 꼽힌다. 중국과 일본을 가르는 게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이다. 계단 왼쪽에 차이나타운이, 오른쪽에 일본풍 거리가 놓였다. 차이나타운의 거리 쓰레기통도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붉은색으로 칠했다. 공자상이나 삼국지벽화, 중국식 정원이 등장한다. 일본풍 거리엔 일본 전통의 목조주택인 마치야(町家)형으로 리모델링한 건물이 늘어섰다. 중국과 일본, 서양의 건축이 제각각인 듯하면서도 한데 어우러지며 이어진다.
근대 문물 ‘최초’ 수식어 많지만
조선인 노동자 수탈 ‘흑역사’도
학계선 “배다리 지역 주목해야”
‘근대란 무엇인가.’ 개항장을 거닐다 문득 이 생각이 들었다. 중구청(옛 인천부)은 청사 앞에 ‘근대 최초 사례로 보는 중구’라는 전시물을 세웠다. ‘축구와 야구의 도입지’ ‘서양과 맺은 최초 조약 체결지’ ‘근대적 기상관측의 시작 인천기상대’ ‘우리나라 근대 세관의 효시 해관’ 같은 수식어를 달았다. 옛 석조 건축물 자리의 여러 전시관도 ‘최초’가 넘쳐났다. 이들 최초는 ‘관광상품’과 ‘관광자원’ 아이디어로 이어진다. 2018년엔 축구 도입 과정을 ‘관광스토리텔링화’하는 차원에서 부유식 해상구조물을 활용한 함상축구경기장을 만들자는 제안이 나오기도 했다.
학자들은 식민지 수탈론이니, 내재적 발달론이니, 식민지 근대화론이니, 탈근대니 하는 학술용어를 두고 인천 개항장을 어떻게 정의할지 다툰다. ‘착취와 수탈’과 ‘근대 문물의 이식’ 사이에서 개항장의 정체성은 여전히 흔들리는 듯했다. 인천 개항장엔 정작 인천 사람, 조선 사람들도 없다. 개항장의 시공간과 이야기에서 배제된 이들이다. 인천 학계와 시민사회에선 청일 조계 때문에 밀려난 조선인들이 형성한 변두리인 동구 ‘배다리 지역’에 주목해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지금은 헌책방 거리로 유명한데,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삶터와 일터였다. 1921년 3월 조선인 여공 150명이 노동착취에 반대하는 동맹파업을 벌였다. 1931년 8월에도 여공 170명이 임금 삭감에 항의해 파업에 나섰다.
개항장에서 조선인의 형상을 확인한 건 하나다.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에서 내려와 항구 쪽으로 가다 보면 옛 창고 건물을 개조한 인천아트플랫폼이 나온다. 측면 벽 아래 한복을 입고 지게를 진 두 사람 조형물을 설치했다. 개항기 이들은 ‘담군(擔軍)’으로 불렸다. 요즘으로 치면 배달노동자, 택배노동자다. 당시 담군과 선박에서 짐을 부리던 ‘하륙군’ 등 조선인 부두노동자들은 일본인 노동자 임금 60% 수준의 저임금에 시달렸다. 하역을 하다 바다에 빠지거나 짐에 깔리는 산재도 빈발했다. 담군 조형물 뒤편 인천아트플랫폼 측면 벽엔 툭하면 착취 비판을 받곤 하는 ‘대한통운’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리 보면 ‘자본주의 정체성’은 국적을 불문하고 뚜렷한 것이다. 투기 목적의 곡물 선물 거래와 조선인들의 패가망신 때문에 악마굴이라 불렸던 미두취인소 존재는 지금 ‘첨단’으로 포장된 자본·금융 거래의 과거를 보여주는 듯하다.
과거 전쟁 땐 ‘군사 요충지’ 활용
지금은 월미도 등 인기 관광지로
묘한 매력의 바다…‘힐링’은 덤
개항장은 월미도로 이어진다. 보행로와 자전거도로를 갖췄는데도 진입로는 굉음을 내며 오가는 대형 트럭과 철조망 때문에 여전히 삭막하다.
중국과 일본이 다툴 때는 군사적 요충지, 일제강점기엔 유원지였다. 한국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의 지점이다. 거대한 반공섬이다.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의 시선이 박힌 곳이 월미도다. 이곳에도 상륙작전을 기념하는 이런저런 군사 조형물이 들어섰다. ‘몽금포작전 전승비’ 안내판엔 “국민의 반공정신 강화에 기여”했다는 글이 적혔다. 박근혜는 대통령이던 2016년 8월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관람하고, 9월 월미도를 찾아 충혼탑 등을 둘러봤다.
월미도 해안가 ‘월미상륙작전’이라 이름 붙인 가게 업종은 비비탄 사격장이다. ‘1950년 9월15일 유엔국 16개국의 월미도 점령작전 기념비’라 새긴 대형 조형물도 들어섰다. 10여m 길이의 조형물 꼭대기엔 태극기를 꽂는 군인의 형상을 만들었다. 고지에서 떨어져 나가는 군인과 고개를 떨군 채 앉은 군인의 형상도 새겼다. 반공과 전쟁의 프로파간다가 곳곳에 박힌 이곳에서 그나마 ‘전쟁의 고통’을 담은 게 이 작은 형상이다.
월미도에도 인천 사람은 없다. 상륙작전 때 원주민 100여명이 폭격과 사격으로 죽었다. 해방 이후에도,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월미도로 돌아가지 못했다. 남한의 <인천상륙작전>이나 북한의 <월미도> 같은 영화의 공통점은 희생자를 외면한 채 영웅 만들기에 치중했다는 것이다.
인천 개항장은 혼종의 매력에다 중국음식과 이국적인 카페가 더해져 인기 관광지로 떠올랐다. 월미도는 그저 보고, 먹고 놀기에 좋다. 이곳엔 키치까지 더해졌다. 월미파크 담벼락엔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 벽화 중 ‘아담의 창조’를 패러디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횟집 한 곳은 인어상과 돌고래상을 간판 위에 설치해 놓았다. 개항장의 혼종이 월미도에서 다시 변주하며 묘한 매력을 발산했다. 어수선하고 시끄러운 곳을 내키지 않아 하는 이들도 탁 트인 바다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글·사진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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