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지만, 아프기도 했던..여긴 '혼종의 바다'

글·사진 김종목 기자 2021. 2. 17.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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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의 중심 '인천 개항장 거리'를 가다

[경향신문]

개항기 이후 군사적 요충지이자 유원지였던 월미도엔 지금 개항 음식점과 테마파크, 바다열차, 군사·반공 조형물이 들어섰다. 인천상륙작전 지점이라는 기록 뒤엔 원주민 희생이라는 슬픈 역사도 서려 있다. 담군(왼쪽 삽화) 등 부두 노동자들이 당한 착취의 역사도 개항장 시공간에서 배제되는 편이다. 인공 시설에 둘러싸인 월미도에서 숨통을 틔우는 것은 바다다. 등대길을 산책하거나 갈매기에게 새우깡 같은 과자를 던져주며 노는 이들도 많다.
중국·일본·서양인이 만든 ‘조계’
인천 내 ‘이국적 정체성’ 만들어
제각각인 듯하면서 서로 이어져

막스 터블스는 1886년 한국에 왔다. 미국 하퍼스 매거진 통신원이었다. 서울 사동(寺洞, 현 낙원동) 민가에 머물다가 천연두에 걸렸다. 옆방 조선인 아이에게서 옮았다고 한다. 입국한 지 한달 만에 사망했다. 기사 한 건 쓰지 못했다. 삶과 죽음을 가른 계기가 하나 나온다. 일본을 경유할 때 천연두 재접종을 거부했다. 그의 죽음 전후 과정에 한국 근대사에 기록을 남긴 외국인들이 등장한다.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호러스 뉴턴 알렌이 치료했다. 장례 예배를 집전한 목사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다.

한국 최초의 서구식 호텔인 대불호텔 자리에 당시 건물을 재현했다. 중구생활사전시관이 들어갔다. 일본 제1은행 지점이었던 인천개항박물관 등 여러 전시관이 이어진다.

‘한국에서 죽은 최초의 외국인 기자’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한국을 최초로 방문한 체코인이다. 체코 외교부 홈페이지에 ‘한국을 여행한 7명의 체코인 이야기-제2차 세계대전 이전 한국을 찾은 그들의 여행담과 한국에 대한 생각’이라는 제목의 글(한국어와 영어)이 있다. 이 글은 “막스 터블스는 보헤미아는 물론 세계 어디에도 한국을 알리는 데 전혀 기여한 바가 없지만, 한국 땅에 발을 디딘 최초 보헤미아인으로서 한국-체코 관계사에 한 획으로 남은 것은 분명하다”고 적었다. 미국으로 이민 가 참여한 샌프란시스코 보헤미안 클럽에서 <악마의 사전>으로 유명한 앰브로즈 비어스와 교류한 기록도 남았다.

제물포구락부는 드라마 <도깨비>에도 나와 더 유명해졌다. 왼쪽 계단을 오르면 자유공원이 나온다. 인천항 일대를 들여다볼 수 있다.

터블스의 짧은 한국 체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인천이다. 제물포항으로 들어왔다. 인천외국인묘지에 묻혔다. 개항장 인천에 한 보헤미안의 이야기도 덧댈 수 있을 듯하다. 인천외국인묘지도 개항기의 일단을 드러낸다. 60기 중 신원을 확인한 50기(1기는 합장) 피장자의 국적은 주로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다. 호주와 스페인 출신이 각각 1명이다. 해군, 해관원, 선교사, 상인들이 대다수다. 북성동에 있던 묘지는 청학동을 거쳐 2016년 인천가족공원으로 옮겨졌다. 중국인 묘지(淸國義地·청국의지)와 일본인 묘지도 지금 이곳에 이장됐다.

이들 묘지는 개항기 인천의 조계(租界)를 그대로 옮긴 듯하다. 인천의 조계는 부산이나 목포, 군산 같은 일본 중심의 그것과 달랐다. 인천은 청국 조계와 일본 조계, 서양인들이 밀집한 ‘각국 조계’로 나뉘었다. 조계는 1883~1914년까지 존속하며 국제적이고, 이국적인 혼종의 정체성을 만들었다.

인천 최초의 가톨릭 건축물이 답동성당.

9일 개항장 거리(incheonopenport.com)를 찾았다. 인천 최초의 가톨릭 건축물인 답동성당에서 출발해 각국 조계지 계단과 자유공원을 거쳐 차이나타운 쪽으로 향했다. 그 뒤 일본풍 거리로 이동했다. 일정을 길게 잡아도 하루 정도 온전히 걸어 다니면 될 거리다. 지난해 시범운영을 거친 인천시는 올해 중 ‘개항장 셔틀버스’를 운영한다.

차이나타운의 분리수거 쓰레기통과 가로등. 개항장은 차이나타운이든, 일본풍거리든 해당국의 익숙한 이미지로 건물과 시설을 재현한 것들이 많다. 일각에선 이 재현만으로 제대로 인천개항장 근대를 담아낼 수 있는지도 묻는다.
중구청 앞은 일본풍 거리다. 마치야(町家)형으로 리모델링한 건물이 늘어섰다. 이 거리는 차이나타운으로 이어진다. 관동교회 너머 빨간 지붕 건물이 인천화교 중산학교다.

각각의 조계지는 저마다 특색이 있다. 각국 조계지 계단 부근엔 서양식 건축물들이 많다. 인천세관에 근무하던 서양인들이 서양주택을 지었다. ‘맥아더 동상’으로 유명한 자유공원도 최초의 서구식 공원으로 꼽힌다. 중국과 일본을 가르는 게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이다. 계단 왼쪽에 차이나타운이, 오른쪽에 일본풍 거리가 놓였다. 차이나타운의 거리 쓰레기통도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붉은색으로 칠했다. 공자상이나 삼국지벽화, 중국식 정원이 등장한다. 일본풍 거리엔 일본 전통의 목조주택인 마치야(町家)형으로 리모델링한 건물이 늘어섰다. 중국과 일본, 서양의 건축이 제각각인 듯하면서도 한데 어우러지며 이어진다.

일본 우선주식회사는 인천과 일본의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선박을 운영하는 기업이었다. 당시 조선인들도 이 배로 일본에 들어가기도 했다. 지금은 인천 아트플랫폼 사무실로 쓰인다.
근대 문물 ‘최초’ 수식어 많지만
조선인 노동자 수탈 ‘흑역사’도
학계선 “배다리 지역 주목해야”

‘근대란 무엇인가.’ 개항장을 거닐다 문득 이 생각이 들었다. 중구청(옛 인천부)은 청사 앞에 ‘근대 최초 사례로 보는 중구’라는 전시물을 세웠다. ‘축구와 야구의 도입지’ ‘서양과 맺은 최초 조약 체결지’ ‘근대적 기상관측의 시작 인천기상대’ ‘우리나라 근대 세관의 효시 해관’ 같은 수식어를 달았다. 옛 석조 건축물 자리의 여러 전시관도 ‘최초’가 넘쳐났다. 이들 최초는 ‘관광상품’과 ‘관광자원’ 아이디어로 이어진다. 2018년엔 축구 도입 과정을 ‘관광스토리텔링화’하는 차원에서 부유식 해상구조물을 활용한 함상축구경기장을 만들자는 제안이 나오기도 했다.

인천이 근대 최초로 내세우는 것 중 덜 알려진 게 플라터너스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플라터너스로 기록됐다. 1988년 각국공원(현 자유공원)이 세워질 때 조경수로 심은 것으로 추정한다. 각국공원은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이기도 하다. 개항장의 ‘최초’와 ‘서구’ 같은 근대 관련 단어들은 근대가 도대체 무엇인지 다시 묻는 듯하다.
인천 화교 소학교·중산학교 담벼락의 벽화.
구 인천 일본 제1은행 지점 자리엔 개항박물관이 들어갔다. 전시관엔 개항기 당시 은행 앞 거리를 재현한 그림이 걸려 있다. 인천의 일본 은행들은 금은 등 귀금속을 일본에 반출하는 역할도 맡았다.

학자들은 식민지 수탈론이니, 내재적 발달론이니, 식민지 근대화론이니, 탈근대니 하는 학술용어를 두고 인천 개항장을 어떻게 정의할지 다툰다. ‘착취와 수탈’과 ‘근대 문물의 이식’ 사이에서 개항장의 정체성은 여전히 흔들리는 듯했다. 인천 개항장엔 정작 인천 사람, 조선 사람들도 없다. 개항장의 시공간과 이야기에서 배제된 이들이다. 인천 학계와 시민사회에선 청일 조계 때문에 밀려난 조선인들이 형성한 변두리인 동구 ‘배다리 지역’에 주목해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지금은 헌책방 거리로 유명한데,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삶터와 일터였다. 1921년 3월 조선인 여공 150명이 노동착취에 반대하는 동맹파업을 벌였다. 1931년 8월에도 여공 170명이 임금 삭감에 항의해 파업에 나섰다.

차이나타운의 한중문화관(오른쪽)과 제물진두순교성지. 문화관 옆은 인천화교 역사관이다. 개항장은 가톨릭 건축물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다. 청국 조계는 당시 청나라의 침략적 성격을 드러낸다. 일제 강점기나 한국 전쟁 이후 한국 사회의 화교에 대한 배제나 중국인들의 피해는 개항장에서 제대로 알 수 없다.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이다. 왼쪽이 일본 조계, 오른쪽이 차이나타운이다. 수m 경계를 두고 중국과 일본이라는 아시아의 거대한 타자의 상징이 양쪽에 들어섰다.
인천 개항기 지게를 지던 담군을 비롯한 부도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산재에 시달렸다. 담군 조형물 뒤편 인천아트플랫폼 측면 벽엔 툭하면 착취 비판을 받곤 하는 ‘대한통운’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개항장에서 조선인의 형상을 확인한 건 하나다.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에서 내려와 항구 쪽으로 가다 보면 옛 창고 건물을 개조한 인천아트플랫폼이 나온다. 측면 벽 아래 한복을 입고 지게를 진 두 사람 조형물을 설치했다. 개항기 이들은 ‘담군(擔軍)’으로 불렸다. 요즘으로 치면 배달노동자, 택배노동자다. 당시 담군과 선박에서 짐을 부리던 ‘하륙군’ 등 조선인 부두노동자들은 일본인 노동자 임금 60% 수준의 저임금에 시달렸다. 하역을 하다 바다에 빠지거나 짐에 깔리는 산재도 빈발했다. 담군 조형물 뒤편 인천아트플랫폼 측면 벽엔 툭하면 착취 비판을 받곤 하는 ‘대한통운’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리 보면 ‘자본주의 정체성’은 국적을 불문하고 뚜렷한 것이다. 투기 목적의 곡물 선물 거래와 조선인들의 패가망신 때문에 악마굴이라 불렸던 미두취인소 존재는 지금 ‘첨단’으로 포장된 자본·금융 거래의 과거를 보여주는 듯하다.

월미도 등대길은 이 섬 명소 중 하나다.
과거 전쟁 땐 ‘군사 요충지’ 활용
지금은 월미도 등 인기 관광지로
묘한 매력의 바다…‘힐링’은 덤

개항장은 월미도로 이어진다. 보행로와 자전거도로를 갖췄는데도 진입로는 굉음을 내며 오가는 대형 트럭과 철조망 때문에 여전히 삭막하다.

중국과 일본이 다툴 때는 군사적 요충지, 일제강점기엔 유원지였다. 한국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의 지점이다. 거대한 반공섬이다.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의 시선이 박힌 곳이 월미도다. 이곳에도 상륙작전을 기념하는 이런저런 군사 조형물이 들어섰다. ‘몽금포작전 전승비’ 안내판엔 “국민의 반공정신 강화에 기여”했다는 글이 적혔다. 박근혜는 대통령이던 2016년 8월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관람하고, 9월 월미도를 찾아 충혼탑 등을 둘러봤다.

월미도 공원 내 몽금포작전 전승비.

월미도 해안가 ‘월미상륙작전’이라 이름 붙인 가게 업종은 비비탄 사격장이다. ‘1950년 9월15일 유엔국 16개국의 월미도 점령작전 기념비’라 새긴 대형 조형물도 들어섰다. 10여m 길이의 조형물 꼭대기엔 태극기를 꽂는 군인의 형상을 만들었다. 고지에서 떨어져 나가는 군인과 고개를 떨군 채 앉은 군인의 형상도 새겼다. 반공과 전쟁의 프로파간다가 곳곳에 박힌 이곳에서 그나마 ‘전쟁의 고통’을 담은 게 이 작은 형상이다.

‘몽금포작전 전승비’ 안내판엔 “국민의 반공정신 강화에 기여”했다는 글이 적혔다. 월미도는 반공, 승전, 군사 조형물이 많이 들어섰다.

월미도에도 인천 사람은 없다. 상륙작전 때 원주민 100여명이 폭격과 사격으로 죽었다. 해방 이후에도,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월미도로 돌아가지 못했다. 남한의 <인천상륙작전>이나 북한의 <월미도> 같은 영화의 공통점은 희생자를 외면한 채 영웅 만들기에 치중했다는 것이다.

월미 테마파크는 명화와 세계 명소를 그린 벽화를 뒀다.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를 키치하게 재현한 그림이 입구에서 손님을 맞는다.

인천 개항장은 혼종의 매력에다 중국음식과 이국적인 카페가 더해져 인기 관광지로 떠올랐다. 월미도는 그저 보고, 먹고 놀기에 좋다. 이곳엔 키치까지 더해졌다. 월미파크 담벼락엔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 벽화 중 ‘아담의 창조’를 패러디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횟집 한 곳은 인어상과 돌고래상을 간판 위에 설치해 놓았다. 개항장의 혼종이 월미도에서 다시 변주하며 묘한 매력을 발산했다. 어수선하고 시끄러운 곳을 내키지 않아 하는 이들도 탁 트인 바다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월미도 둘레길을 걷다보면 인천항 7부두 사일로(Silo·곡식저장시설) 벽화가 나온다. 높이 48m, 길이 168m, 폭 31.5m 규모의 벽화는 2018년 ‘세계에서 가장 큰 야외벽화’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흉물로 취급받던 사일로에 책 모양의 벽화를 그린 아이디어도 높게 평가받았다. 삭막한 월미도 진입로에서 그나마 숨통을 틔워주는 시설이다.

글·사진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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