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항쟁의 목소리' 전옥주씨, 오월 영령 곁에 잠들다

김용희 2021. 2. 17.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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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불의를 못 참는 성격이에요. 내 상식으로는 군인들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어요."

지난 16일 급성질환으로 72살로 세상을 떠난 5·18민중항쟁의 주역 전옥주(본명 전춘심·영정)씨는 2018년 인터뷰에서 시위에 참여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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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참가 호소 '거리방송' 전옥주씨 별세
고문·간첩조작·옥살이 후유증 시달려
고 전옥주씨의 빈소. 5·18부상회 제공

“내가 불의를 못 참는 성격이에요. 내 상식으로는 군인들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어요.”

지난 16일 급성질환으로 72살로 세상을 떠난 5·18민중항쟁의 주역 전옥주(본명 전춘심·영정)씨는 2018년 인터뷰에서 시위에 참여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밝혔다. 전씨는 그때 “처음에는 시위대에 물을 떠다 주는 일을 하다 오후부터 본격적으로 거리방송을 했다. 데모 경험 한 번 없었지만 마이크를 잡았다”고 말했다.

전남 보성에서 살던 전씨는 1980년 5월19일 광주의 오빠 집에 들렀다가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해 항쟁에 참가했다. 이튿날부터는 광주 학운동 동사무소에서 간이 방송장비를 빌려 차명숙씨와 함께 거리를 누비며 방송을 시작했다.

“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우리 형제자매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도청으로 나오셔서 우리 형제자매들을 살려주십시오”라는 전씨의 외침은 광주시민을 거리로 이끌었다. 전씨는 5·18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 속 배우 이요원씨의 실제 주인공으로, 2018년 5·18기념식에 참석해 가두방송을 재연하기도 했다.

1980년 5월21일 옛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 직전 전옥주씨가 시위대 단상에 서서 전남도지사와의 협상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씨는 석가탄신일인 21일에는 전날 광주역 근처에서 숨진 주검 2구를 손수레에 싣고 금남로로 이동하며 시민들의 동참을 호소했다. 그의 목소리는 시민을 격분하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항쟁 때 전씨를 곁에서 지켜본 김범태 한국투명성기구 광주전남운동본부 상임대표는 “청바지 차림의 세련된 모습이었던 전씨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중을 휘어잡는 능력이 있었다. 나도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시위에 합류했다. 전씨가 있었기에 5월21일 10만 인파가 전남도청 앞에 모일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계엄군 아저씨, 당신들은 피도 눈물도 없습니까”라고 외치기도 했던 전씨는 계엄군에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김희송 전남대 5·18연구소 연구교수는 “계엄군의 증언을 보면, 공수부대원들은 새벽마다 들려온 절규하는 목소리에 분열증이 생길정도였다고 한다. 군인들 사이에서 ‘저 여자는 꼭 죽여버려야 한다’는 말이 돌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전씨는 1980년 5월21일 계엄군의 옛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 직전 시민대표 4명에 뽑혀 장형태 전남도지사를 만나 ‘계엄군을 물러나게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는 결국 5월22일 보안대에 체포됐다. 수사관들은 갑자기 등장해 시위를 주도한 그를 북한 간첩교육기관 ‘모란봉’에서 2년간 특수교육을 받은 여간첩 ‘모란꽃’(암호명)이라고 조작했다. 이때 구타와 여성으론 감당하기 힘든 고문을 당한 전씨는 평생 후유증에 시달렸다. 전씨는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4월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그뒤 그는 경기도에 가정을 꾸리고 5·18 진상 알리기 활동을 했다.

1980년 9월12일 광주 상무대(전투교육사령부)의 ‘계엄보통군법회의’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전옥주씨(원 안). 5·18부상자회 제공

고인은 생전 인터뷰에서 “광주시민들도 나를 계엄군 프락치나 간첩으로 오해해 한동안 ‘광주’를 잊으려고 했다”면서도, 1989년 국회 광주청문회가 열리자 증인으로 출석해 광주 참상을 증언했다. 청문회에서 전씨는 “간첩으로 조작당하는 과정에서 송곳으로 무릎을 수없이 찔리는 등 살인적 고문을 당했다“고 밝혔다. 사망 원인도 고문후유증으로 얻은 지병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고인은 국립5·18민주묘지에 묻힌다.

유족으로는 남편과 3남1녀가 있다. 빈소는 경기도 시화병원장례식장, 발인은 19일 오전이다. (031)5189-0445.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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