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밸런타인데이?.. 100여년前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
오래 전부터 우리말 한자 발음이 아닌 중국어 발음으로 불러왔던 곳이 있다. 바로 하얼빈이다. 하얼빈은 한자로는 합이빈(哈爾濱)이지만 우리는 합이빈이 아닌 하얼빈이란 중국어 발음으로 늘 불러왔다. 그것은 아마도 안중근 의사(義士)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안 의사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후 이듬해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하지만 매년 2월 14일은 젊은 사람들에겐 초콜릿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고백하는 날인 '밸런타인 데이'로만 기억된다. 우리 역사에서 잊어서는 안 되는 2월 14일을 기억하면서 근대의 하얼빈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1909년 6월 9일자 샌프란시스코의 교민들이 발행하는 신한민보에 '하얼빈 한인학교'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있다. "만주 이북 하얼빈 지방에 거주하는 동포 중, 김성옥, 방사첨, 김성백, 유장춘씨 등이 조국의 비참한 형편과 동포의 암매(暗昧; 우매한)한 사상을 개탄하여 야학교를 설립하고 국한문과 역사, 산술 등 각 항의 실용과정을 교수하는데, 학원(學員; 학생)이 일증월가(日增月加; 날로 증가함)하여 현재 40여명이요, 장차 진취(進就) 지망생이 많다 하니, 여러 분의 뜻있는 사업을 백배 치하(致賀)하노라."
1910년 10월 28일자 매일신보에는 고국을 떠나 해외로 간 재외 조선인의 수에 대한 기사가 눈에 띈다. "해외에 산재한 인구를 개거(槪擧; 열거)하면 아래와 같으니, 상항(桑港; 샌프란시스코)에 약 4000명, 묵서가(墨西哥; 멕시코)와 포와(布와; 하와이)에 각 2000명, 포염(浦염; 블라디보스톡)에 약 4000명, 하얼빈에 약 400명, 상해에 약 50명, 연해주와 흑룡강 연안에 약 20만명이 있으니, 연해주와 흑룡강 지역에는 농업에 종사하는 자와 노동자가 많다더라." 이는 1910년 한일합병 전에 이미 많은 국민들이 일제의 압박을 피해 고국을 떠나 해외로 떠나갔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하얼빈이 단순히 농사를 짓거나 노동만을 위해 간 사람들만 있던 곳은 아니었다. 1920년 11월 25일자 매일신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게재되어 있다. "상해임시정부의 외교부장 박용만은 금년 7월 이후 러시아 모스크바에 가서 동지와 왕래를 하며 무슨 일을 계획하는 중이다. (중략) 10월 하순에 하얼빈에 나와서 빈번히 무슨 일을 계획하는 중이라고 전하는 말이 있더라." 이를 보면 하얼빈이 독립운동의 한 거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하얼빈 하면 빠질 수 없는 이야기는 안중근 의사에 관한 이야기다. 안 의사에 관한 이야기는 대한민국 국민이면 그 누구라도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마는, 근대 신문을 통해 좀 더 알아보기로 하자.
안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다음날인 1909년 10월 27일 신한민보에 '이토(伊藤), 만주에서 피살(被殺)'이라는 제목으로 "일본 원로 이등박문이가 하얼빈에서 한인(韓人)이 던진 폭발약에 피살하였는데, 동행하던 만주철도 총재(일본인)와 일본 총영사는 중상을 당하였다더라"라는 기사가 실려있다.
속보(續報)도 냈다. "이토 히로부미가 한인의 육혈포에 맞아 당일 오후에 죽었고, 살해한 사람은 잡혔으며, 이토를 죽인 사람의 말은 '자기의 국가 원수(怨讐)와 사사(私事; 개인적인 일) 원수를 갚으려고 이토를 쫓다가 마침내 죽였다'고 하였고, 탄환이 연속 폭발하여 이토는 등을 맞아 즉사하고,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川上)와 만주철도 총재 다나카, 이토 히로부미의 서기도 피상(被傷)하였는데, 그 중 가와카미가 중상(重傷)하였다더라. 이토를 죽인 사람을 잡아 문답할 때 그가 대답하길 '내가 이곳에 온 바, 유일한 목적은 이토를 죽임으로써, 나의 나라 원수를 갚으려 함이라 하였고, 또한 한국에 있던 자기의 근친(近親; 가까운 친척) 여럿을 이토가 죽여 그 원수를 씻고자 함'이라 하였더라."
1910년 9월 18일자 매일신보에는 '하얼빈 기념비'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다. "하얼빈에 거류하는 일본인 유지들은 고(故) 이토 공작이 조난(遭難)한 곳에 대 기념비를 건립하기로 결정하고, 건립지 매수의 등절(等節; 모든 예절과 절차)을 러시아 관헌에게 교섭한 즉, 대 찬동을 하고 편의(便宜)하도록 회답한 고로, 근근이 건립하는 중이라더라."
안 의사는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일본인 변호사 미즈노(水野)의 수첩에다 다음과 같은 한시(漢詩)를 썼다. 이 한시는 다음날인 2월 14일 오사카마이니치(大阪每日)신문에 실린다. '曲突徙薪無恩澤(곡돌사신무은택) 焦頭爛額爲上客(초두난액위상객) 爲楚非爲趙(위초비위조) 爲日非爲韓(위초비위한)'이라는 한시다.
앞의 두 줄은 중국 역사책인 한서(漢書) 곽광전(藿光傳)에 나오는 내용이다. '곡돌사신'(曲突徙薪)이란 '굴뚝을 구부리고 굴뚝 가까이에 쌓아 놓은 땔감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는다'는 뜻으로, 화근을 미리 없애 재앙을 예방한다는 유비무환의 의미다. 안 의사가 이 글의 의미를 미즈노 변호사에게 설명하기를, "나는 이토라는 땔감을 치워 한국이라는 굴뚝에 불이 나지 않도록 하였고, 나아가서 동양(東洋)이라는 집을 태우지 않도록 한 선각자이다. 즉 하얼빈의 거사는 비단 한국을 위해서뿐 아니라 일본을 위해서, 더 나아가 동양평화를 위한 거사였음을 당당히 밝히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안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뤼순(旅順)감옥의 형장에서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순국했다. 반면 친일파들은 이토가 죽자 일본에 사죄단을 파견하고 한성(漢城)에서 이토를 추도하는 모임을 열었다고 당시 신문은 전한다.
한 쪽 면만 보고 세상을 살 수는 없다. 앞으로 우리의 젊은이들이 매년 2월 14일 '밸런타인 데이'에 사랑을 고백하는 것도 좋지만 100여년 전 저 먼 이국 땅 하얼빈에서 뜨거운 총탄으로 '나라 사랑'을 고백했던 안중근 의사도 함께 기억하기를 바란다. 우리가 기억해야할 사람은 성(聖) 발렌티노가 아닌 안중근 의사다. '밸런타인 데이'가 안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았던 날이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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