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무죄는 사회 경제질서 무너뜨리는 판결"
[경향신문]
환경법·보건·예방의학 등 분야의 전문가들은 가습기살균제를 제조·판매한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전직 대표, 임직원 등에 무죄를 선고한 판결이 우리 사회의 경제질서에 혼란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제품의 안전성에 대한 신뢰가 경제질서를 유지하는 근간인데, 그 신뢰를 배반해도 된다는 부정적인 신호를 줬다는 것이다. 이들은 또한 재판부가 과학적 연구방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며 항소심을 위해 공동대응할 것을 밝혔다.
환경보건·환경법·의학 등 분야의 연구자들로 구성된 6개 학회는 17일 서울대 보건대학원에서 ‘가습기살균제 무죄 판결의 학술적 검토’ 심포지엄을 열고 지난달 12일 서울중앙지법이 내린 가습기살균제 1심 판결의 한계를 분석했다. 심포지엄에 참가한 6개 학회는 대한예방의학회, 대한직업환경의학회, 한국역학회, 한국환경법학회, 한국환경보건학회, 환경독성보건학회이다.
이날 심포지엄에서 각 분야 전문가들은 1심 재판부가 과학적 사고방식 및 연구방법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인과관계에 대한 법리를 오해한 것으로 보이며, 일부 증거들은 명확한 이유없이 배제한 채 판결을 내렸다고 지적했다.
지정토론자로 나선 오지원 변호사는 “(소비자들이) 제품의 효용과 안전성을 신뢰하고 구매하기에 시장이 지금과 같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라며 “따라서 제품의 안전성에 대한 신뢰는 우리 사회의 경제질서를 유지하는 근간인데, 피고인들은 그 신뢰를 배반했다”고 말했다. 판사 출신인 오 변호사는 “1심 판결은 기업인들에게 ‘국가가 사후에 위해성을 단정할 수 있을 정도로 과학적, 의학적 입증을 하지 못하는 이상 처벌되지 않고 손해배상을 할 일도 없다’는 매우 부정적이고 안일한 시그널을 줄 수 있다”면서 “이는 소비자들의 신뢰와 건전한 경제질서의 유지에 치명적인 불안정과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1심 판결에 대해 “선량한 다수 소비자들의 피해와 위험을 방치하고, 기업에만 지나친 자유를 보장해주면서 공동생활과 사회질서를 보호하는 형법의 기능을 무너뜨릴 우려가 있다”며 “결국 다수 국민들의 법에 대한 신뢰조차 무너뜨리게 된다는 점을 항소심은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발제자로 나선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박태현 교수는 재판부의 과학적 사고방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1심 재판부가) 인체 피해 사례 및 이에 기반한 연구들의 중요성과 가치를 낮게 평가한 반면 보완적 의미를 지니는 동물실험의 결과에는 지나치게 높은 비중을 부여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인과관계는 반드시 의학·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법적·규범적 관점에서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면 증명이 있다고 보아야 하며, 소송에서 드러난 여러 사정을 고려하여 경험칙과 사회통념에 따라 합리적인 추론을 통하여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례를 소개했다. 인과관계에 대한 1심 재판부의 법리 해석이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것이다.
1심 재판부가 뚜렷한 이유없이 중요한 증거들을 배제한 채 판결을 내렸다는 지적도 나왔다. EH R&C 환경보건안전연구소 이종현 소장은 “최종판결에 영향이 클 것으로 예상되는 핵심적인 실험적 증거를 명확한 근거 없이 배척함해 논란의 소지가 크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CMIT/MIT성분이 함유된 가습기살균제 제품에 대한 위해성 평가 결과인 2편의 논문과 1편의 보고서가 재판 증거자료로 제출됐다”면서 “그러나 판결문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위해성평가 방법을 적용하지 않은 채 정반대되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하루 20시간 동안 흡입 노출했을 때의 폐염증 반응을 확인한 흡입노출 독성시험 결과(국립환경과학원, 2019)는 가습기살균제 흡입노출에 의해서 CMIT/MIT가 하기도에 도달했다는 명백한 실험적 증거”라면서 “판결문은 흡입노출에 의한 폐염증 반응에 대한 실험결과와 전문가들의 검토의견에 대해서 언급 자체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안전성평가연구소 이규홍 흡입독성연구단장은 재판부가 동물실험 가운데 기도 내 점적을 통한 실험을 언급하지 않은 점에 대해 지적했다. 이 단장은 “기도 내 점적은 흡입노출의 용량이 증가하면서 나타날 수 있는 독성작용을 확인하는 데 적합한 실험방법”이라면서 기존의 호흡기 노출 연구에서 일반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연구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이종현 소장은 “판결문은 2019년 이규홍 박사팀에 의해서 수행된 기도 내 점적투여에 의한 폐섬유화 관찰결과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며 “기도 점적을 통해서 확인된 폐손상 유발 가능성은 CMIT/MIT가 폐에 도달하는 경우 폐손상을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시켜준 실험적 증거로 해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연세대 원주의대 김재용 교수는 “CMIT/MIT가 포함된 가습기살균제 제품만을 사용한 피해자들에서 다양한 폐 손상들이 진단, 확인, 치료, 검증, 인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소송에서 의학-역학적 근거들은 거의 철저히 외면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1심 재판부는 판결문에 “현재까지 여러 기관에서 수행한 동물 흡입독성시험에서 비강, 후두 등 상기도 염증이 관찰된 결과는 있었으나 CMIT/MIT가 이 시간 폐질환 혹은 천식을 유발하거나 악화시키는 것이 확인된 시험은 없었다”고 적었다.
한국방송통신대 보건환경학과 박동욱 교수는 재판부가 제품의 위험을 잘못 평가했으며 CMIT/MIT의 체내 거동에 대해서도 잘못된 근거를 들어 판결을 내렸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재판부는 CMIT/MIT 제품의 위험을 합성세제, 물 휴지, 섬유유연제, 세정제 등 소비제품의 위험성 평가 결과와 비교해서 안전하다고 했다”며 “재판부가 인용한 소비제품들은 노출(사용)빈도가 매우 작고, 호흡기로의 흡수 가능성도 낮아 위험이 작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아이, 임산부를 포함한 가족들이 매일 6시간 넘게 수개월 동안 사용하는 가습기 살균제의 위험을 희석하고 왜곡한 판단”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재판부는 바로 씻어내는 화장품에 적용하는 MIT 기준을 CMIT/MIT 혼합 허용 한도로 잘못 인용하고, 비교해서 가습기 살균제 제품의 위험을 희석했다”고 비판했다.
박 교수는 이어 “재판부는 CMIT/MIT가 수용성이기 때문에 호흡기 하부 질환인 폐 손상, 천식을 일으킬 가능성이 낮다고 했다”며 “하지만 호흡기 하부 질환을 일으킨 수용성 화학물질 사례는 질소산화물, 황산화물, 암모니아, 오존, 포스겐, 농약, 알데히드류, 포름알데하이드 등 매우 많다”고 설명했다. 그는 “CMIT/MIT 노출로 노동자가 천식을 입은 사례도 있으며 무엇보다 CMIT/MIT 제품을 쓴 피해자의 폐 손상의 특징이 다른 가습기살균제 유해물질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사용자와 유사하다는 임상 논문도 여러 편 있다”면서 “이는 CMIT/MIT가 호흡기 하부까지 도달해서 천식과 폐 손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과학적 증거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날 심포지엄에서 6개 학회 학회장들은 1심 판결의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앞으로 진행될 항소심에 공동 대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환경보건학회장인 대구가톨릭대 산업보건학과 양원호 교수는 “이번 판결은 위해에 대한 고려 없이 화학물질(제품)을 제조할 수 있도록 국가가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이후 화학물질 제조·사용·노출에 따른 국민건강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양 교수는 “CMIT/MIT를 포함한 가습기살균제 제품 사용자가 폐질환을 나타내었다는 것은 무엇보다 가장 명확한 인과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환경독성보건학회 전 회장인 인하대 의대 임종한 교수는 “이번 사건이 국민 건강을 훼손하는 어떤 기업의 불법행위도 용납될 수 없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며 6개 학회에 가습기살균제 피해 재판에 공동대응하는 대책위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또 대한예방의학회 학회장인 성균관대 의대 정해관 교수는 “형사 소송의 무죄추정 원칙을 환경 소송에도 일률적으로 적용할 경우 기업이나 개인에 책임을 물릴 수 없다”며 “피해가 현저하고 광범위함을 고려할 때 피해자에 대한 책임은 사전 예방 원칙에 따라 합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환경법학회장인 전남대 로스쿨 정훈 교수는 “환경문제에 있어서 ‘합리적 의심 없는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는 것은 환경 피해에 대한 보호를 포기하는 것’이라는 판례가 이미 나온 바 있다”며 “1심 재판부가 환경·보건의료문제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고전적인 형사법적 증명에 매몰돼 있던 점에 아쉬움을 표한다”고 말했다. 대한직업환경의학회장인 가톨릭의대 구정완 교수는 “과학적 불확실성을 이유로 사실관계를 부정한 이번 판결이 앞으로 이어질 법정 다툼에서 피해자들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가 든다”며 “과학적 근거에 대한 오독을 근거로 오판이 이뤄져 유감이며 연구자들은 이를 바로잡을 사회적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심포지엄에 종합토론자로서 참가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의 유족인 김태종씨는 1심 판결에 대해 “무죄 선고의 근거는 동물실험 결과, 원인이 불분명하거나 피해증상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며 “하지만 이는 일부 동물에 실험한 결과로 인체에 대한 영향을 판단한, 어처구니 없는 판결이라고 생각한다”며 “만약 코로나 백신의 안정성을 확인할 때 인체에 대한 임상실험 결과 없이, 동물실험에서 문제되는 반응이 없으니 인체에도 별 문제가 없다며 백신을 맞으라고 해도 괜찮겠냐”고 말했다. 김씨의 아내는 2007년 10월부터 이마트 PB상품인 ‘이플러스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했으며 13년 동안의 투병 끝에 지난해 8월10일 세상을 떠났다.
종합토론자로 나선 환경보건시민센터 최예용 소장은 이날 심포지엄에 대해 “개별 연구자들을 넘어 의학과 환경 분야 주요 6개 학술단체들이 공동주최한 이번 학술심포지엄은 다수 과학자 단체의 문제해결 노력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김기범 기자 holjja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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