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김범수의 시, 김범석의 물 / 최우성
[편집국에서]
최우성ㅣ산업부장
최근 열흘 새 큰 화제가 된 재계 인물은 단연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과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이다. 김범수 의장은 약 10조원대 재산의 절반을 사회에 기부한다고 선언했고, 쿠팡은 뉴욕증권거래소 상장을 위한 증권신고서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에 제출했다. 2010년 카카오톡과 쿠팡을 나란히 탄생시킨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66년생과 78년생 띠동갑(말띠)이다.
두 사람의 인생 궤적은 다른 듯 닮은꼴이다. 농사를 짓다 상경한 집안의 여덟 식구가 단칸방에서 지냈다는 김범수 의장의 과거는 대기업 주재원의 아들로 중학교 때 미국으로 건너간 이민 1.5세대라는 김범석 의장의 과거와 언뜻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 전국 최대 피시(PC)방(미션넘버원)을 창업하고(김범수), 매거진(<커런트>)을 창간해 몇년 뒤 성공적으로 매각한(김범석) ‘20대의 시간’은 두 사람이 공유하는 또다른 과거의 한 조각이다. 카카오와 쿠팡이라는 현재를 만든 씨앗인지도 모른다.
어느덧 국내 증시 시총 10위권에 안착한 카카오는 손바닥 안에서 우리의 24시간 일상을 지배하는 ‘거대한 우주’다. 몸값만 55조원이라는 쿠팡의 현주소는 여러 경쟁자에 견줘 한 걸음 앞선 게 맞다. 그럼에도 최근 두 기업이 잇달아 쏘아 올린 화제의 뉴스에 논란이 따른 것도 사실이다. 김범수 의장은 재산 기부 선언에 앞서 두 자녀 등 친인척에게 1400억원대 지분을 증여했다. 이 과정에서 김 의장의 개인회사 케이큐브홀딩스를 정점으로 둔 카카오 대기업집단 의사결정 과정의 불투명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쿠팡의 뉴욕 증시 상장 추진을 두고선 한국 시장에서 거둔 열매가 나라 밖 투자자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리라는 일각의 비판도 나온다. 쿠팡이 증권신고서에 “독립 배송 파트너를 사용하는 서비스”를 ‘위험요소’라 명시한 건 플랫폼 노동자를 바라보는 쿠팡의 시선을 잘 드러낸다.
물론 두 기업과 관련된 여러 논란은 저마다 배경도 상황도 다르다. 그럼에도 ‘한 묶음으로’ 짚어볼 만한 대목이 분명히 있다. 우선 모바일 플랫폼 시대의 ‘젊고 잘나가는’ 기업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불균형 문제다. 기업의 몸집이 불어나는 속도를 시스템이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는 현상이다. 최근 김범수 의장이 보인 일련의 행보와 관련해 카카오 측은 거듭 (김 의장의) ‘선의’를 강조한다. 카카오가 이미 자본시장의 핵심 플레이어로 자리 잡은 터라 이런 생각은 위험하기 그지없다. 시장의 언어와 문법, 즉 의사결정 과정의 투명성과 절차성은 최소한의 규칙이다. 선의를 의심해서가 아니다. 선의는 영원히 그(들)의 자랑일지언정 리스크는 온전히 시장의 몫이어서다. 이른바 ‘블리츠스케일링’ 사례에 딱 어울리는 쿠팡의 사정은 더 심각하다. 인맥 관리 사이트 링크트인의 공동창업자인 리드 호프먼이 주장한 블리츠스케일링은 ‘묻지마식 덩치 키우기’ 전략을 말한다. 선점 효과가 성공의 열쇠인 플랫폼 기업을 유혹하는 전략으로, 쿠팡의 누적 적자가 4조5천억원에 이른 비밀도 이와 무관치 않다. 뉴욕 증시 상장이 더 많은 자금을 유치하려는 전략이자 동시에 탈출구로 해석되는 이유다.
정부와 기업의 역할과 관련해서도 이번 논란은 우리 사회에 중요한 물음을 던진다. 김범수 의장은 재산 기부 결정의 배경으로 “기존 방식으로 풀 수 없는 사회문제”를 들었다. 분명 반가운 일이다. 가진 자가 재산을 통 크게 내놓을 때 세상은 환호한다. 다만 이는 기업(정부)의 과도한(왜소한) 존재감의 또다른 얼굴이란 점도 꼭 되새겨야 한다. 쿠팡의 행보를 따라가노라면 여태 정상 궤도에 오르지 못한 국내 자본시장 현실과도 마주친다. 힘센 자 앞에서 무시로 규율이 무너지는 시장은 건강하지도 비옥하지도 않다. 미래를 건 투자를 받아낼 토양이 못 된다. 이를 두고 차등의결권을 허용하지 않는 등 과도한 정부 규제 탓에 국내 시장을 버렸다는 식의 주장은 우습기 짝이 없다.
김범수 의장은 평소 랠프 월도 에머슨의 시(‘무엇이 성공인가’)를 마음에 담아둔다고 알려져 있다. 일찌감치 미국 사회에 녹아든 김범석 의장은 거듭 ‘큰물’을 강조해왔다. 김범수의 시와 김범석의 물. 자라온 환경은 다르나 오늘의 성공으로 두 사람을 끌고온 마음속 동력일 거라고 믿는다. 지금은 맹목적인 찬사나 질시, 혹은 비난일랑 피할 때다. 이번 논란에서 작은 깨달음이라도 얻을 시간이다.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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