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평범한 부부가 건보공단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내는 이유
[경향신문]
2019년 5월 결혼한 김용민씨(31)와 소성욱씨(30)는 2주에 한 번 이마트에 가서 장을 본다. 용민씨는 진미채나 멸치를 볶아 밑반찬을 미리 만들어 놓는다. 성욱씨는 재택근무를 하다가 용민씨가 퇴근하면 저녁식사를 만든다. 소시지를 볶아 용민씨가 만든 밑반찬을 곁들인다. 간단히 차린 저녁식사를 먹고 누가 설거지를 할 지 티격태격한다. 요즘 부부들이 흔히 하는 것처럼 작은 방 안에는 컴퓨터 2대를 설치했다. 게임을 좋아해 연애할 때도 PC방 데이트를 즐겼다.
두 사람의 일상은 보통의 신혼부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게 있다면 혼인 신고를 하지 못 했고, 모두 남성이라는 것 정도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두 사람이 소송을 준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둘은 18일 오전 11시 서울 서초구 서울행정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건강보험(건보) 공단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하기로 했다. 건보 직장가입자인 용민씨의 피부양자 자격이 취소된 성욱씨에게 지역가입자 건보료 부과 처분한 것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이다.
지난해 2월26일 건보 직장가입자인 용민씨의 피부양자로 성욱씨가 등록됐다. 성욱씨의 이름 옆에 ‘배우자’라고 적혀있었다. 성욱씨는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야 하는데, 지역가입자여서 매달 건보료를 따로 내야 한다. 직장가입자는 배우자 등 가족을 피부양자로 등록할 수 있다. 사실혼 관계도 가능하다. 용민씨는 건보공단 홈페이지에 동성 부부로 혼인신고를 하지 못 했지만 결혼식을 올린 사실혼 관계라는 글을 올렸다. “사실혼 관계 배우자는 피부양자 취득이 가능하다”는 답변이 달렸다. 서류를 준비해 피부양자 등록 신청을 했고, 며칠 뒤 성욱씨는 피부양자 자격을 취득했다.
지난해 10월23일 주간지 <한겨레21>에 둘의 사연이 소개되고 상황이 바뀌었다. 기사가 공개된 뒤 용민씨에게 건보공단에서 전화가 왔다. “담당 직원인데 실수로 처리했다”는 얘기였다. 일방적으로 피부양자 자격이 취소됐다. 이후 용민씨가 받은 공문엔 ‘피부양자 인정 조건 미충족’이라는 짧은 설명만 있었다.
두 사람이 고민 끝에 자신의 모습을 노출하고 감정적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 소송을 하기로 한 것은, 그래도 이런 과정을 통해 한국 사회에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다. “주변에 저희처럼 사실혼 관계로 지내는 커플들이 많아요. 이런 권리를 그냥 당연히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해 포기하는 분들도 있어요. 결혼식 때 와 준 친구들도 ‘나도 이렇게 결혼할 수 있겠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줬다 빼앗아 간’ 권리라 되찾고 싶어요.” 용민씨는 말했다.
동성 커플의 사실혼 관계를 다룬 대법원 판례는 아직 없다. 2004년 인천지방법원에서 “동성 간의 사실혼 유사의 동거관계”라며 사실혼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은 사실혼이 성립하기 위해선 “당사자 사이에 주관적으로 혼인의사의 합치가 있고, 객관적으로 부부공동생활이라고 인정할 만한 혼인생활의 실체가 존재하여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용민·성욱 부부에게 해당된다. 하지만 부부를 이성 간의 관계로 보는 법 제도에서 동성 커플로 사실혼 관계를 인정받는 일은 쉽지 않은 싸움이다.
두 사람의 법률 대리인단 소속 백소윤 변호사는 “사실혼은 법률혼이 인정되지 않거나 법률혼의 주체로 인정받을 수 없는 관계를 범위를 달리해 인정하는 지위이고, 제도권 밖의 배우자 관계를 법률 안으로 포섭한 것”이라며 “피부양자 제도에 사실혼 관계가 적용된 건 혼인이 금지된 동성동본 관계나 혼인신고를 못해 불합리한 처분을 받는 걸 보호하려는 취지임을 생각해 동성 사실혼 관계도 인정받을 수 있도록 쟁점을 정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소송을 준비하는 그들은 평범한 일상을 입증해야 하는 일이 지치기도 한다. 용민씨는 소송 서류로 제출하기 위해 결혼식 방명록을 한 장씩 스캔하면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고 했다. 이미 결혼해 같이 살고 있는 데, 그걸 또 입증해야 한다는 게 이상하기만 했다.
피부양자 자격이 취소된 날 두 사람은 집에서 신혼여행 사진을 찾아봤다. 둘은 스페인으로 9박10일 신혼여행을 갔다. 성소수자에게 가장 친화적인 도시로 알려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가는 게 성욱씨의 오랜 소원이었다. 성소수자의 다양성을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이 창문에 걸린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길거리에선 남성 커플이 키스하는 모습을 봤는데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자신들의 관계를 인정받지 못한 그날, 그들은 신혼여행 때의 기억을 자꾸만 떠올렸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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