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학교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 문수현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몇주 전부터 아이는 채권자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불안하게 서성거렸다.
시도에 따라 혹은 학교에 따라 다르게 대응한 듯도 하지만, 전국의 많은 아이들이 방구석에서 온라인 녹화 강의를 듣느라 혹은 듣지 않고 괴로워하느라 한해를 보냈는데, 왜 학부형들도 교사단체도 학교를 열자는 주장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전세계를 다 조망할 필요는 없겠으되 대부분의 산업국가에서 아이들을 학교로 부르는 데 우선순위를 두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문수현 ㅣ40대 학부모·서울 용산구 이촌동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몇주 전부터 아이는 채권자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불안하게 서성거렸다. 가끔은 머리카락을 휘저어 베토벤 머리처럼 만들기도 했다. 어렵사리 이유를 물으니 들어야 할 녹화 강의가 밀린 끝에 감당할 수 없는 분량이 되어버린 탓이었다. 세상을 잘 모르는 아이는 그로 인해 졸업을 못 하는 건 아닐까 불안해하고 있었다.
무심한 엄마는 그제야 부모가 ‘출근’한 집에서 서성이며 온라인 수업을 듣다 말다 괴로워한 아이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불현듯 답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커다란 물음표가 생겼다. 자영업자들, 교회들, 학원들 모두 문을 열도록 해줄 것을 강하게 요구하고 때로 격렬히 시위도 벌였는데, 왜 학교를 열자는 움직임이 없었을까. 시도에 따라 혹은 학교에 따라 다르게 대응한 듯도 하지만, 전국의 많은 아이들이 방구석에서 온라인 녹화 강의를 듣느라 혹은 듣지 않고 괴로워하느라 한해를 보냈는데, 왜 학부형들도 교사단체도 학교를 열자는 주장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것도 우리처럼 교육열이 높은 사회에서.
이웃나라 일본 아이들이 지난해 내내 학교를 다닌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확진자가 많게는 수만명이던 독일의 경우를 보면, 작년 3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 학교가 문을 닫았다가 하이브리드 수업을 시작했다. 반은 교실에서, 반은 인터넷으로 접속하는 수업이다. 여름방학 이후 확진자가 치솟게 된 12월 중순까지는 교실 수업을 진행했다. 프랑스 경우는 더 분명하다. 다른 모든 시설을 닫는 동안에도 학교 출석은 의무로 했다. 전세계를 다 조망할 필요는 없겠으되 대부분의 산업국가에서 아이들을 학교로 부르는 데 우선순위를 두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주위 학부형들과 대화한 끝에 다시금 확인하게 된 것은 많은 이들에게 학교가 그 존재 의의를 상실한 지 이미 오래라는 점이다. 한국의 학생들은 코로나 이전에도 사실상 주간학습과 야간학습의 2부제 교육을 받고 있었다. 본격 학습을 담당하는 학원의 경우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로 인해 2주만 문을 닫아도 감당할 수 없는 민원에 시달렸고, 그 결과 시장의 수요에 재빨리 대응하여 실시간 온라인 수업, 하이브리드 수업 등 다양한 방식으로 충분한 학습량을 제공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한 교육 위기 때 존재 가치를 명확하게 입증한 것은 ‘교육부 지침’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안) 움직인 학교가 아니라 시장의 수요에 빠르고 분명하게 대응한 학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교사단체들의 입장은 어떠한가? 전교조가 지난 1년간 낸 보도자료들의 키워드는 “차등성과급 폐지”, “국가보안법 7조”, “성범죄”, “법외노조” 등이었다. 코로나 상황에 다수의 제자들이 집 안에 머물러 있는 상황에 대해 가슴 아파했을 선생님들의 모임인 교사단체의 대응이라고 보기에는 누가 보더라도 무리가 있다.
학교는 과거로부터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유지되어야 할 것 같지만 현재 없어도 그다지 아쉽지 않은 제도가 되어버린 듯하다. 이 집단 무의식이 올해라고 사라질 리는 만무해 보인다. 한국의 성인에게 접종이 완결될 것으로 예상되는 올해 말이나 내년 초까지 우리 아이들은 며칠이나 등교를 하게 될 것인가? 그렇게 학교가 없다시피 한 2년을 심지어 교사단체조차도 (겉보기에) 가슴 아파하지 않은 채 보내고 난 다음, 우리는 어떤 이름으로 다시 학교를 열 수 있을까? 50만에 육박하는 교육공무원이라는 거대한 관료제 기구를 유지하기 위해서?
학부모로서, 그리고 사회적 분업의 일부로서 노동을 담당하고 있는 직업인으로서 초중교 교육이라는 다른 사회적 업무를 담당한 분들께 묻고 싶다. 등교일수 30일과 40일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으신가? 그렇다면 왜 그런가? 아니라면 30일이 아니라 20일, 10일 혹은 0일이 아니라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아이들을 한명이라도 더, 하루라도 더 학교에 불러 품으려고 진지하고 절박하게 노력하고 있는가?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옥중경영 되나 안 되나…‘이재용 취업제한’ 침묵하는 삼성, 왜?
- 할리 타는 요리사 신계숙 “스승 손에 장을 지지게 하고 싶었다”
- 신현수 수석 사의 파동 이면엔 청와대·검찰 ‘깊은 갈등의 골’
- 백기완 없는 거리에서 / 김진숙
- 정의당 장혜영, 미 주간지 ‘100명의 떠오르는 인물’ 선정
- 5·18 계엄군 성폭력 5건 더 있었다
- 학폭이 한때 장난? 피해자엔 풀 길 없는 ‘평생 트라우마’
- 서울 6호선 연장, 마석이냐 와부냐
- 80년대생 임원 “개인 성장-조직 성과 별개 아냐…가교 역할 최선”
- ‘자본 너머’ 공생하는 세상을 묻다, 여성의 소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