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동자동이라는 평상 / 조문영

한겨레 2021. 2. 17.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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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동자동 사랑방 사무실 앞에는 항상 주민들이 모여든다. 사랑방 게시판에는 어느 교회의 ‘자장면 선교회’가 몇 월 며칠 자장면을 나눠준다는 공고도 있었다.

조문영ㅣ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20년 전 현장연구를 한다고 서울 난곡 지역을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버스 종점에 내려 판잣집들 사이로 난 좁은 길을 오르다 보면 숨이 가빠졌는데, 내 맘을 읽기라도 한 듯 멈춰 선 골목 가장자리에 평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평상은 늘 붐볐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병뚜껑을 한 보따리 풀어놓고 부업을 했고, 할아버지들이 비닐 봉다리에서 막걸리를 꺼냈다. 수급자 조사를 나온 동사무소 직원도, 나 같은 학생도 평상에 걸터앉아 주민들과 잡담을 나눴다. 재개발사업으로 철거가 시작되면서 동네는 어수선했지만, 그래도 주민들은 지팡이를 짚고, 안줏거리를 들고 평상을 찾았다. 소문이라도 귀동냥하고, 남의 흉이라도 보고, 있는 사람 욕이라도 하려면 일단 누구라도 만날 자리가 필요했다.

서울역 맞은편 동자동 쪽방촌을 찾을 때마다 난곡의 평상을 떠올렸다. 쪽방촌은 곳곳이 평상이다. 주민들은 좁은 골목길에 쭈그려 앉아 햇볕을 쬐었고, 주민협동회 사무실에 들렀다가 삼삼오오 모여 앉아 한담을 나눴다. 쪽방촌 귀퉁이 새꿈공원에서 무연고 주민의 장례를 치르는 날은 추모의 변과 술 취한 구경꾼의 욕설이 뒤섞이면서 동네가 시끌시끌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유독 정이 많아 평상을 만든 건 아니다. 쪽방촌 건물 대부분이 지어진 지 30년이 넘었다. 방이 너무 좁고 답답해서, 환기가 안돼서, 너무 외로워서 일단 나와야 했다. 수급비 대부분이 방세로 나가는 형편이다 보니 걸음은 동네 골목만 맴돌았다. “가난이 모이는 것은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이문영, <노랑의 미로>). 어찌 됐든 사회관계가 일찌감치 단절된 사람들에게 평상의 힘은 대단했다. 정부 지원으로 매입주택이나 임대아파트로 이사한 주민들도 다시 쪽방촌을 찾았다. “가난과 다투는 것은 가난”(앞의 책)이지만, 가난을 이해하는 것도 가난이었다. 이 평상도 언젠가 난곡에서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건 아닐까? 불안했다. 건물주가 안전을 문제 삼아 강제퇴거를 종용하는 일이 빈번했고, 서울의 “노른자” 땅을 두고 재개발 소문이 무성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동자동을 포함한 쪽방촌 정비를 공공주택사업으로 추진하기로 한 정부 결정이 무척 반갑다. 국토교통부, 서울시, 용산구가 함께 발표한 서울역 쪽방촌 주거환경 개선 추진계획에 따르면, 쪽방촌 주민 1000여명이 입주할 수 있는 공공주택 단지가 현재의 쪽방촌 자리에 조성될 예정이다. 공공주택을 먼저 지어 쪽방 주민들을 정착시킨 뒤에 민간분양 주택을 건설하는 순환형 개발로 가닥을 잡았다. 지난해 용산참사 11주기에 발표된 ‘영등포 공공주택사업’ 추진계획을 필두로, ‘개발’이 곧 ‘내쫓김’이던 한국 도시 빈민의 역사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가난한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며 집단이주 사업을 감행하고 공동체를 도모했던 빈민운동가들의 선구적 노력을 40여년이 지나서야 정부가 정책으로 화답했다. 최근 ‘벼락거지’란 표현에서 보듯, 부동산 논의가 중산층 내부의 상대적 박탈감에 치우친 탓에 이 정책의 의의가 충분히 공유되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정부의 새 정책은 시작부터 난항이다. 가난한 세입자를 폐기물처리장의 유기견처럼 살게 해놓고 현금 수익을 꼬박꼬박 챙겨온 건물주들이 “대한민국이 사회주의 국가냐”며 반발한다. 사유재산을 신성불가침으로 보는 백여년 전의 자본주의로 시계를 되돌릴 게 아니라면, 현재 방안을 쪽방 주민들의 요구에 맞춰 세공하는 데 시간을 쏟는 편이 낫겠다. 현 계획은 주민을 지원 대상으로만 본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다. 서울역 쪽방촌 공공주택 추진 티에프(TF)에는 오랫동안 활동해온 주민자치단체가 아닌 주민지원시설(쪽방상담소)만 포함되었다. 공공주택사업을 도시재생과 연계하여 “쪽방 주민들의 자활·상담 등을 지원하는 복지 시설을 설치”한다는 계획은, 가난한 사람들이 일궈온 평상을 서비스센터의 부스로 되돌렸다. 오래전 난곡에서 주민들이 직접 출자해 의료협동조합을 운영하면서 상호의존의 연대를 도모한 역사는 “천원의 밥값”을 선언한 동자동사랑방의 식도락 사업으로, 무연고 장례와 공제협동조합 운동으로 면면히 이어져왔다(정택진, <동자동 사람들>). 공공개발을 거쳐 좀 더 안전하게 거듭날 동자동이, ‘가난 사파리’(대런 맥가비)가 아니라 인간 삶의 ‘평상’을 고민하는 실험장이 되도록 정부와 쪽방 주민, 활동가, 동료 시민이 중지를 모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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