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엄마가 죽으면 어떡하지?

김은형 2021. 2. 17.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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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영화 <레이디버드>. 드레스를 입은 딸을 보는 엄마의 표정이 복잡다단한 모녀 관계를 말해준다.

김은형ㅣ논설위원

지난해 말 코로나19의 이상한 엔(n)차 피해가 결국 우리 집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엄마가 방문했던 한의원에서 확진자가 나오는 바람에 엄마는 큰언니를 대동해 집 근처 선별진료소로 갔다. 검사 결과는 음성이 나왔지만 팔순 노인에게는 코로나와 막상막하로 위험한 골절 사고를 당했다. 진료소 앞 상가 화장실에 들어가다가 아래로 푹 꺼진 바닥을 디디며 넘어져 고관절이 부러진 것이다.

옛날 같으면 노인들에게 시한부 선고와도 같은 고관절 골절도 기술이 발전해 무사히 수술을 마쳤다. 하지만 모든 스토리가 그렇듯 안심하는 순간 반전이 일어났는데 기력을 잃은 엄마는 정작 퇴원 뒤 아무것도 드시지를 못했다. 하루에 한 수저도 들기 힘든 날들이 일주일 넘게 이어지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생각, 성인이 된 뒤 마음속 가장 밑바닥에 구겨 넣고 있었던 두려움이 올라왔다. ‘엄마가 죽으면 어떡하지?’

부모의 죽음이란 게 경험한다고 연습되는 건 아니지만 십년 전 아버지를 보내는 건 생각보다 수월했다. 물론 갑작스럽게 쓰러지고 돌아가시기까지 충격과 두려움을 감당하면서 단거리 장애물 경주처럼 가족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숱한 순간은 고통스러웠고 작별은 아득했다. 하지만 막상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너무나 빨리 평정심을 찾는 바람에 나는 냉혈한인가라는 고민까지 들었다. 맺힌 거 없는 사이였기 때문에 편하게 보내드리는 거라는 친구의 위로 아닌 위로가 힘이 됐다.

그래서 두렵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는 게. 그때 왜 엄마한테 그렇게 모질게 말했을까, 왜 엄마의 사소한 부탁을 야멸차게 거절했을까, 왜 좀 더 자랑스러운 딸이 되지 못했을까, 풀리지 않는 실타래를 오랫동안 붙잡고 있을 게 뻔하다.

부질없는 생각인 거 안다. 아마 다음 생에 다시 엄마와 딸로 태어나도 우리는 같은 주제로 언성을 높이고 서로 상처 줄 것이다. 모녀관계는 그 자체로 그냥 병이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비교하면 나는 이 병증이 심하지 않은 편에 속한다. 대놓고 또는 암묵적인 차별에 대한 긴장을 호흡처럼 해야 하는 남자 형제가 없고 부모의 기대와 집착을 한몸에 받는 첫째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춘기 이후 삼십년 동안 엄마와는 잘 풀리는 듯하다가 삐걱대고, 아슬아슬하다가 폭발하는 관계를 이어왔다. 서점에 가면 <나는 엄마가 힘들다> 유의 모녀관계 서적이 선반 하나를 꽉 채우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 병은 약도 없다는 생각을 새삼 다시 한 게 3년 전 영화 <레이디버드>를 보면서였다. 고등학교 졸업파티에 입을 드레스를 사기 위해 엄마와 중고 가게에 간 주인공이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입고 나오자 엄마는 똥 씹은 표정이다. “그냥 예쁘다고 하면 안 돼?” 딸이 발칵하자 엄마는 말한다. “나는 언제나 네가 최고의 모습이길 바라.”

젊은 시절 내내 그랬다. 새 옷을 입고 자랑하면 엄마는 “그걸 십만원이나 주고 샀다고?”라거나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글쎄, 난 잘 모르겠다”라고 핀잔했다. 더 열 받는 건 책 <엄마, 왜 나한테 그렇게 말해?>에서 말한 것처럼 엄마들은 딸에게 솔직하게 말하기보다 돌려까기를 한다는 점이다. 한껏 차려입으며 외출 준비를 하는 나에게 “설마, 그러고 나가려는 건 아니지?”라는 식이다. 이렇게 사사건건 딸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이유는 단 하나. “내 딸이 제일 예쁘기를 바라니까 그러지.”

그런 엄마보다 더 어이없는 건 딸, 그러니까 나다. 어차피 엄마에게 잘 보이려고 꾸미는 것도 아닌데도 “엄마가 마음에 안 들어 하니 천만다행이네”라며 독을 내뿜는다. 그러고는 얼마 뒤 다시 엄마한테 매달려 “촌스러운 중년 아줌마”의 인정을 갈구한다.

딸을 자신의 분신으로 생각해서든,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대체재로 봐서든 엄마는 딸이 빛나기를 진심으로 염원한다. 그 진심이 진짜 진심임을 알기 때문에 딸은 엄마의 기대를 끊어내지 못하고, 엄마의 기대를 채우기 위해 몸부림치고, 결국 기대를 채우지 못해 좌절과 분노와 죄책감을 느낀다. 모성신화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던 작가 에이드리엔 리치가 “때때로 오직 죽음만이 우리를 서로에게서 해방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암담하게 한탄했던 건 그의 세 아들을 향한 이야기였지만 나는 이게 모녀관계에서 더 진실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해방까지는 아니지만 엄마의 ‘감식반 반장’ 눈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엄마를 좀 더 이해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려놓은 건 내가 아니라 엄마였다. 그리고 엄마를 내려놓게 한 힘은 더 이상 딸과의 신경전을 버텨낼 재간이 없는 엄마의 기력이었다. 몇달 전 엄마 집에서 나올 때 차의 사이드미러로 보이는, 불면 날아갈 듯 깡마른 백발 할머니를 보면서 깨달았다.

다행스럽게도 엄마는 조금씩이나마 다시 식사를 하게 됐다. 하지만 전과 달리 손주를 보고 반가워하는 것도 잠시뿐, 하루의 대부분을 누워 계신다. 무한대로 재방송을 하는 트로트 프로그램에 최고로 볼륨을 높인 이어폰을 꽂고서. 딸 셋의 일거수일투족에 간섭하고 참견하던 엄마가 다시는 나오지 않을 굴속으로 들어간 것만 같다. 나는 두렵다. 엄마가 죽으면 정말 어떡하지.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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