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위주의 역사에서 밀려난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되살리다
정정화 등 14인 초상화 전시
'사진+상상' 채색화로 담아내
“제 한 몸을 불살랐으나 결국 얻지 못하고 찾지 못한 채 중원에 묻힌 수많은 영혼들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을 대신해 조국에 가서 보고해야만 한다. 싸웠노라고, 조국을 위해 싸웠노라고. 나는 아들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국이 무엇인지 모를 때는 그것을 위해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보라고. 그러면 조국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독립운동가 정정화(1900~1991)는 회고록 ‘장강일기’에 이같이 적었다. 대갓집에서 태어나 고운 얼굴만큼이나 곱게 살 줄만 알았던 그는 고위 관료였으나 일제에 저항한 시아버지와 남편이 상해로 망명하자 스무 살 나이에 홀로 그들을 찾아 떠났다. 부모가 준 묘희라는 이름 대신 ‘정화’라 쓰면서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고, 세 차례나 임시정부(임정) 밀사로 국내를 오가며 자금 조달 임무를 수행했다. 주변에서는 그가 조자룡 같은 담력을 지녔다며 “온 몸이 담덩어리”라 했다. 임정의 안주인이라 불리며 해방을 맞았으나 독립운동의 공을 인정받기는커녕 구금됐던 한 많은 인물이다.
원로작가 윤석남(82)은 ‘정정화 초상’에 짙은 파란색 옷을 입혔다. 꼭 쥔 보따리와 의자 아래 숨긴 가방은 조국의 운명까지 담긴 그녀의 막중한 임무를 드러낸다. 그의 얼굴은 흔들림 없이 담대하다. 몸 뒤로 감춘 한쪽 손, 언제든 달릴 준비가 된 두 발은 가늠할 수 없는 강인함을 숨기고 있다.
‘아시아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로 통하는 윤석남이 이번에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에 주목했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갤러리 본관에서 17일 개막한 ‘윤석남,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는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나 남성 위주의 역사에서 밀려난 여성 독립운동가 14인의 초상화로 채워졌다.
전시장 입구에서 마주치는 첫 작품은 박자혜(1895~1943)의 초상이다. ‘단재 신채호의 아내’로 더 유명한 이다. 조선총독부의원 간호사였던 그는 3·1운동 부상자를 치료하다 민족적 울분을 느끼고 간호사들과 ‘간우회’를 조직해 일제와 싸웠다. 그림 속 박자혜는 여순감옥에서 옥사 후 뼛가루로 돌아온 남편의 유골함을 움켜쥐고 오열하고 있다. 온순한 얼굴이 원통함에 일그러졌다. 전시장에서 만난 윤 작가는 “역사 속 실존 인물이라 사진 기록에 근거해 그리려 했지만 자료가 많지 않아 고생했다”면서 “얼굴은 실제이나 그림 속 상황과 모습 등은 온전히 작가적 상상”이라고 말했다.
초상 속 인물들은 유난히 손이 크고 억세다. 윤 작가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는데 내가 ‘손’을 사람 전체를 상징하는 매개로 여기는 듯하다”면서 “손이 가진 힘과 의미가 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쉼 없이 그림을 그리던 그의 손도 굵게 불거졌다.
작가의 가슴을 가장 세게 내려친 인물은 교육자로 민족 운동에 헌신한 김마리아. 일본 경찰의 심문 앞에서 “한시도 독립을 생각하지 않은 일이 없다”고 당당하게 답했던 인물을 화가는 정면을 응시하는 강렬한 눈, 높이 치켜 든 손을 통해 진취적으로 묘사했다.
영화 ‘암살’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 남자현은 조선 독립을 청원하며 왼손 무명지를 잘라 혈서를 썼다. 흰 한복 차림의 인물을 감싼 주황색 배경이 강한 의지를 대변한다.
전시장 안쪽은 주홍색 벽면이 에워싼 공간에 나무 조각들을 세운 설치작품 ‘붉은 방’이 차지했다. 여성의 삶을 상징한 ‘핑크룸’ ‘그린룸’ 연작을 선보였던 작가는 ‘붉은 방’에 대해 “독립운동가들의 피와 열정을 상징하는 붉은색”이라며 “종이를 잘라 만든 850여 점의 콜라주 벽면은 인간과 자연, 설명할 수 없는 추상적 요소의 세상 만물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맞은 편 벽면에는 전시 주인공들 중 9명의 얼굴 초상이 일렬로 걸렸다. 힘이 불끈 들어간 콧망울, 화난 듯 치켜뜬 눈매의 인물들이 과거 작가가 그린 그의 자화상과도 닮았다. 전시는 4월3일까지.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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