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의 미래_마지막 이야기]"소재 혁명은 학문의 경계서 시작한다"
길을 걷다가 눈앞에 멋진 풍경이 펼쳐지면 저절로 스마트폰이나 카메라를 들어 올린다. 하지만 사진에 담긴 풍경은 눈으로 보는 것과 다를 때가 있다. 녹색 나뭇잎과 푸른 하늘은 어딘지 모르게 노르스름하고 사진 곳곳에 잔상이 생길 때도 있다. 보통 사람들은 ‘고수는 장비 탓을 하지 않는다’는 격언을 떠올리며 자신의 실력을 탓하지만 이 경우만큼은 정말 ‘장비 탓’일 수 있다. 카메라에서 눈의 망막 역할을 하는 이미지 센서가 감지하는 빛의 파장 범위가 눈보다 넓어 불필요한 빛까지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카메라에 내장된 이미지 센서가 눈에 보이는 색을 나타내는 능력을 ‘해상력’이라고 한다. 가끔씩 사진이 노랗거나 푸르게 보이는게 이유가 바로 해상력이 낮기 때문이다. 사람의 망막에 있는 원추세포는 빛에서 파장이 400~700nm(나노미터·10억 분의 1m) 범위의 가시광선만 선택적으로 흡수해 뇌가 정확한 색을 인식하도록 하지만 이미지 센서는 가시광선보다 파장이 긴 적외선까지 흡수하기 때문에 적외선이 가시광선에 섞여 해상력이 떨어진다. 적외선 중에서도 가시광선의 파장 범위인 700nm에 가까운 파장을 가진 근적외선이 해상력에 가장 큰 영향을 준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이미지 센서 앞에는 적외선을 차단하는 필터가 달려있다.
필터의 소재는 여러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우선 카메라 내부에서 빛을 받아들여야 하므로 열이나 자외선에 노출돼도 성질이 바뀌지 않아야 한다. 적외선은 차단하면서 가시광선은 그대로 통과시켜야 한다. 가시광선과 파장이 비슷한 근적외선일수록 차단하기 더 어렵다.
박성흠 부경대 물리학과 교수팀은 태양전지와 발광다이오드(LED)의 계면에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유기 분자를 설계하는 연구를 중점적으로 하고 있다. 연구팀은 다년간의 분자 설계 경험을 해외 수입에 의존하던 필터 소재 개발에 적용했다. 그 결과로 파장이 705nm인 빛을 흡수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소재보다 더 가시광선에 가까운 704nm 파장의 빛을 흡수하는 소재를 개발했다. 근적외선을 차단할 뿐만 아니라 가시광선 투과율이 높고 내열성과 내광성도 높다. 지난해 12월 한국섬유개발원(KTDI)에서 내광성을 테스트한 결과 20시간 동안 자외선에 노출돼도 변질되지 않아 1~5등급 중 4등급 이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등급이 높을수록 내광성이 우수하다는 뜻이다.
박 교수는 "태양광에서 특정 파장의 빛만 골라낸다는 점에서 태양전지와 카메라 필터의 원리는 비슷하다"며 "태양전지를 연구하며 계속해서 분자를 설계했기 때문에 특정 파장의 적외선과 자외선을 흡수하는 분자 구조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태양전지는 태양광을 실생활에 쓸 수 있는 전력으로 전환하는 장치로, 전력은 전류와 전압의 곱이다. 모든 파장의 빛을 흡수하면 전류는 커지지만 전압은 작아지기 때문에 전력을 최대로 하는 파장만 선택적으로 흡수해야 성능이 좋다.
박 교수는 원하는 성질을 가진 분자를 만들려면 데이터가 많아야 하고 시행착오를 줄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추진하는 하이브리드 인터페이스 기반 미래소재연구단 사업에 참여해 이런 시행착오를 더욱 줄일 수 있었다.
박 교수는 "필터 소재는 분자의 뼈대가 되는 골격에 여러 물질을 붙여 만드는 데 골격에서 광적, 전기적 성질이 결정되고 나머지 성질은 붙이는 물질에 따라 결정된다"며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데이터를 참고해 어떤 물질을 붙일지 결정하고 미래소재연구단에서 시뮬레이션하는 팀의 도움을 받아 어떤 성질이 나타날지 예측했다"고 말했다. 시뮬레이션 결과를 토대로 실제 실험을 진행하고 시뮬레이션 값과 다르면 경험을 통해 예측한 부분을 보정해 분자를 완성한다.
연구팀이 만든 필터의 또 다른 장점은 유기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유리와 비슷한 무기물 소재의 필터는 빛을 반사한다는 단점이 있다. 렌즈를 통해 들어온 가시광선이 반사되면 원래 상이 맺혀야 할 곳에 맺히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 맺히는 '고스트 현상'이 일어난다. 사진을 찍었을 때 불빛의 잔상이 여기저기 보이는 이유가 바로 고스트 현상 때문이다. 유기물로 만든 필터는 플라스틱과 비슷해 가볍고 휘어지면서도 빛을 반사하지 않아 잔상이 맺히지 않는다.
○ 필터색소 전문 벤처도 설립
연구팀은 이렇게 개발한 필터 색소를 상용화하고 기술을 선점하기 위해 2018년 1월 벤처기업 힘테크를 설립했다. 필터 소재는 작년 12월 15일 국내 특허를 마쳤고 삼성과 일본 기업에 보내 성능을 검증받고 있다.
올해는 충남테크노파크에 힘테크 연구소를 추가로 세워 다른 벤처와 협업을 통해 본격 적극적으로 상용화할 생각이다. 필터 소재 외에 삼성, LG에서 연구 중인 폭발 방지용 소화약제도 개발할 계획이다. 폭발 방지용 소화약제는 스마트폰 배터리 폭발을 막기 위해 불을 끄는 소화약재를 온도가 일정 수준을 넘으면 터지는 유기물 소재로 감싼 물질이다. 특정 온도에서만 반응해야 하고 인체에 무해해야 하며 디바이스에 손상을 주지 않아야 해서 경계면에서 유기물을 설계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순수 국내 기술로 만든 필터소재는 4차 산업혁명의 주력 산업에서 사용되는 핵심소재 기술을 선점하고 소재를 국산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019년 일본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소재 수출을 제한한 상황에서 국산 기술로 필터 소재를 만들면 필터의 제조 원가를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
박 교수는 소재 혁명은 물질의 경계뿐 아니라 산업계와 학문의 경계, 학문과 학문의 경계에서도 일어난다고 말한다. 실제로 박 교수가 필터 소재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대기업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산업계에서 국산 기술로 만든 필터 소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다. 학문적으로 소재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는데 산업계에서는 모르고 있던 것이다. 또 소재를 분자로만 보는게 아니라 에너지 같은 물리학적 개념으로 접근하는 시각이 필요하다.
박 교수는 "물리학에서는 분석만 하고 화학에서는 합성만 하고 공학에서는 장치만 만드는 시대는 지났다"며 "거대한 현상은 물질의 경계와 학문의 경계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또 "한 분야에서 이루기 어려운 일이 다른 분야에서는 쉬울 수도 있다"며 "물질이든 학문이든 융합이 잘 이뤄졌을 때는 상당한 시너지가 날 것"이라고 말했다.(끝)
※ 최근 소재 연구에서는 첨단기능을 가져 ‘부가가치’를 내는 소재를 찾는 일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두 소재를 맞붙이면 그 표면에서는 이전에는 발견하지 못하던 새롭고 놀라운 기능과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정부가 세계 수준의 성과를 내기 위해 설립한 10개 글로벌프론티어사업단 중 하나인 하이브리드 인터페이스기반 미래소재연구단은 서로 다른 물질이 닿는 ‘인터페이스(경계면)’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두 물질을 붙일 때 생기는 경계면에서는 기존 두 물질을 이루는 결합구조나 조성과는 다른 새 물질이 생겨납니다. 두 물질의 경계면은 새로운 소재가 생성되는 보고(寶庫)인 셈입니다. 동아사이언스는 미래소재연구단과 함께 앞으로 한국의 소재 산업을 이끌 미래 소재의 깜짝 놀랄 세계를 연재로 소개합니다.
[김우현 기자 mnch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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