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정직한 시선으로 포착한 '석굴암의 장엄과 신비'

김석 2021. 2. 17.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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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본존불


여기, 흑백사진이 한 장 있습니다. 이 사진에 포착된 장면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겠죠. 교과서에서 숱하게 보았을 테고, 단골 수학여행지 경주 관광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곳. 하지만 석굴암은 그 신비로운 모습을 쉽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훼손을 막기 위한 유리벽이 처져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한국인 치고 석굴암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도, 석굴암을 제대로 본 사람 또한 안타깝게도 없습니다.

사진집 《석굴암, 그 사진》(국립문화재연구소, 2020)


지난해 10월의 어느 날, 커다란 책 한 권이 도착했습니다. 흰 바탕에 글자 몇 개뿐인 사진집이었죠. 제목은 《석굴암, 그 사진》, 펴낸 곳은 국립문화재연구소였습니다. 책을 펼쳐 글과 사진을 찬찬히 눈에 담았습니다. 이 책에 실린 석굴암 사진들은 그냥 사진이 아니었습니다. 사진을 찍은 이는 문화재 전문 사진가 故 한석홍 선생. 제게는 생소한 분이었죠. 사진은 익숙해도 사진가는 기억되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고인은 1981년부터 세 차례 석굴암 사진을 찍었습니다. 한평생 문화재 전문가로 일한 덕분에 한석홍 선생의 사진은 웬만한 미술관, 박물관 전시 도록에는 어김없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저 누가 찍었는지 몰랐을 뿐이죠. 2015년에 작가가 세상을 떠난 뒤 유족은 고인이 세상에 남긴 사진과 필름을 뜻있는 곳에 쓰고 싶었습니다. 석굴암의 아름다움을 더 많은 이가 나누었으면 하고 바랐죠. 될 수 있으면 해외 각지로도 널리 알려져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알리는 마중물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故 한석홍 작가


그래서 유족은 2019년과 2020년에 걸쳐 한석홍 작가가 남긴 사진과 필름 1,172점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기증했습니다. 그 사진들 가운데 엄선한 석굴암 사진을 모은 사진집이 어느 날 제게 온 것이고요. 국보를 찍은 사진도 국보급입니다. 이런 자료들은 또 그것대로 대단히 귀중한 사료가 됩니다. 역시 사진작가인 고인의 아들 한정엽 씨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의 작업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습니다.

“세 번 촬영 중에 2000년도에 가서 직접 참가한다고 하고 옆에서 작업하시는 모습을 다큐 사진으로 찍었어요. 사실 예전에는 어떤 유물이나 문화유산에 대해서 몰랐을 때는 아, 저 사진이 일반 사람처럼 그렇게 어려운 사진인가 생각했었는데, 제가 옆에서 지켜보고 또 직접 해보니까 하면 할수록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아, 이 석굴암 사진을 내가 만약에 진짜 한다고 그러면 이렇게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정말 하기가 어려운 거다. 그래서 이 시대의 증거물, 이 시대의 기록으로서 의미가 더 크다고 생각해요.”

조건 없는 기증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분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 있는 귀중한 유품인 동시에 때로는 돌아가신 분 자체이기도 할 테니까요. 그런데도 고인의 유족은 기꺼이 그 모든 아버지의 유산을 국가에 내어놓았습니다. 바라는 건 단 하나. 석굴암의 아름다움을 더 많은 이에게 알렸으면 좋겠다. 더 많이 가지려고 혈안이 된 시대에 그 살뜰한 마음이 참 고맙습니다.

전실에서 본 석굴암 내부 전경


사진집을 낸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이번에는 한석홍 작가의 사진 69점을 고화질 디지털 이미지로 다듬어 누리집(nrich.go.kr, 자료마당-기증자료)에 공개했습니다. 저작권을 완전히 풀어서 누구나, 언제든, 무료로 내려받아 활용할 수 있게 한 겁니다. 그 덕분에 석굴암의 장엄과 신비로 가득한 아름다운 사진들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정말 귀중한 것은 나눌 때 그 가치가 더 커지는 법이죠. 그런 마음으로 보니 사진도 더 달리 보입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로 잘 알려진 혜곡 최순우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한석홍 작가는 그 덕분에 꾸밈없이 담백하고 정직한 사진을 찍으려 애썼다고 합니다. 그 어떤 장식이나 수식이 필요할까요. 석굴암을 그저 석굴암답게 찍으면 그만인 것을. 아들은 아버지의 석굴암 사진을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님은 굉장히 엄정한 사진가이셨어요. 역사를 기록한 사관처럼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굉장히 올바르게 기록을 하려고 하셨어요.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사진이라든지 영상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굉장히 화려하고 그렇지만, 아버님 같은 경우에는 그런 것보다는 정직하게 기록하는 것, 장인들의 숨결 하나하나, 마치 옛날 어진(임금의 초상화)을 그리는 화가처럼 터럭 하나라도 다르지 않게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계셨어요. 기록 정신이 투철하셨죠. 사명감도 있었고 거기에 열정도 있었고. 그건 저도 못 따라갈 것 같아요.”

김석 기자 (stone21@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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