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식 기자와 평양 함께 걷기] 김일성의 나라 북한, 북한은 개혁 개방을 할 수 있을까? ④

안정식 기자 2021. 2. 17.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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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노동당 총비서가 지난 8~11일 당 전원회의를 소집해 경제계획에 적극적이지 않은 간부들을 호되게 나무랐습니다. 조선중앙TV가 공개한 영상을 보면, 김정은 총비서는 간부들에게 손가락질을 해가며 화가 난 표정으로 질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전원회의에서는 경제계획과 관련된 주제 외에도 주요하게 논의된 의제가 있었습니다. 북한이 두 번째 의안으로 상정했던 주제, 바로 '전 사회적으로 반사회주의, 비사회주의와의 투쟁을 더욱 강도 높이 벌일 데 대하여'였습니다. 김 총비서는 "우리(북한)의 사상과 제도를 위협하고 일심단결을 저해하는 악성종양을 단호하게 수술해버릴 혁명적 의지와 결심을 천명"하면서, "반사회주의, 비사회주의적 행위들을 무자비하게 억제소멸하고 우리(북한) 식 사회주의를 공고발전시키기 위한 투쟁"을 강조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북한)식 사회주의'라는 것은 김일성 일가의 왕조적 전체주의 체제를 말합니다. '우리식 사회주의'를 공고히 하기 위해 비사회주의와의 투쟁을 강화한다는 것은 '김일성의 나라'를 흔들리게 하는 어떤 시도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북한은 지난해 12월 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전원회의에서도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을 채택했는데, 이 법은 "반사회주의사상문화의 유입, 유포 행위를 철저히 막고 우리(북한)의 사상, 우리(북한)의 정신, 우리(북한)의 문화를 굳건히 수호함으로써 사상진지, 혁명진지, 계급진지를 더욱 강화하는 데서 모든 기관, 기업소, 단체와 공민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준칙들을 규제"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국정원은 어제(16일) 국회 정보위에서 북한이 이 법을 통해 남한 영상물을 북한 내로 유포할 경우 최대 사형에 처하도록 처벌을 강화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러한 최근 움직임을 보더라도 북한은 지금의 왕조적 전체주의 체제에서 변화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북한은 개혁 개방을 할 수 있을까'라는 주제와 관련해 연재를 이어가고 있는데 오늘은 마지막으로 어떤 정치적 환경에서 과감한 개혁 개방이 가능한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개혁 개방에서 중요한 것은 정치 지도자의 의지이겠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지도자의 의지만으로 모든 것이 실행되지는 않습니다. 지도자의 의지가 그와 부합하는 정치적 환경과 만났을 때 정책의 실현이 가능한데, 과감한 개혁 개방은 어떤 정치적 환경에서 가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 중국 · 베트남의 개혁 개방이 가능했던 정치적 환경

먼저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중국·베트남의 사례입니다. 중국·베트남에는 어떤 정치적 환경이 조성되었기에 개혁 개방이라는 과감한 정책 방향의 전환이 가능했을까요?

사회주의 체제에서 권력 승계는 정책 혁신의 기회로 작용한다고 합니다. 이때 새로운 지도자가 혁신을 시도하는 경우는 혁신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맞을 때입니다. 혁신을 통해 정책의 우선순위를 변화시키면서 지지 기반을 확대할 수 있다고 믿을 때 새로운 지도자는 혁신을 시도합니다. 쉽게 말해, 혁신이 정치적 이득이 될 때 지도자는 혁신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중국과 베트남에서 개혁 개방이 가능했던 것은 덩샤오핑과 응우옌 반 린으로 권력 승계가 이뤄진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새로운 지도자로의 권력 승계는 정책 혁신의 기회로 작용하는데, 두 사람이 집권할 당시 중국과 베트남의 상황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고수'보다는 개혁을 추진하는 쪽이 지지 기반 확대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덩샤오핑이나 응우옌 반 린에게는 개혁을 선택하는 쪽이 정치적 이득과 부합했다는 뜻입니다. 두 나라의 사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덩샤오핑 전 중국 주석


● 마오쩌둥 오류 비판하며 권력 장악한 덩샤오핑

중국의 경우 본격적인 개혁 개방은 덩샤오핑의 권력 장악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덩샤오핑이 개혁을 내세운 것은 덩샤오핑이 문화대혁명의 피해자로 3년간의 숙청 생활을 거치면서 중국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느낀 점도 있지만, 마오쩌둥의 후계자인 화궈펑과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개혁정책을 내세우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덩샤오핑이 등장하던 시기의 중국의 상황을 살펴볼까요. 마오쩌둥은 중국 혁명을 이끈 상징적인 존재이긴 하지만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등 일련의 실책을 계속하면서 중국 인민들의 삶은 궁핍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마오쩌둥 이후의 새로운 지도자는 이러한 경제적 난관에 해답을 제시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의 실질적인 수혜자이자 마오쩌둥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된 화궈펑은 마오쩌둥의 과업에 대해 비판할 수 없는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화궈펑으로서는 마오쩌둥에 대한 부정은 곧 자신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이었고, 문화대혁명으로부터 배출된 젊은 세대의 지지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화궈펑은 이에 따라 사인방을 비롯한 일부 급진파를 제거하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멀리 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화궈펑은 마오쩌둥의 유지를 기본적으로 계승함으로써 변화를 최소한으로 한정시키려 했고, 문화대혁명의 일부 극좌적인 잘못만 바로잡는다면 문화대혁명이 남긴 상처는 치유되고 정치적 혼란 또한 종식될 것이라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화궈펑이 이렇게 현상 유지적인 정책을 취하자 덩샤오핑은 개혁을 주창하면서 화궈펑을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됐습니다. 덩샤오핑과 문화대혁명 당시 정치적 숙청을 당했던 원로 혁명가들은 화궈펑이 문화대혁명의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반박하면서 문화대혁명의 과오를 시정하고 개혁을 추진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마오쩌둥의 이념 우선주의에 대한 반대와 실용적 정책의 옹호가 이들이 주장하는 개혁정책의 방향이었습니다. 이러한 공격이 목표로 하는 정치적인 종착점은 물론 화궈펑의 낙마였습니다. 덩샤오핑과 그의 세력들에게는 마오쩌둥 시기의 오류를 비판하면서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지지세력 확산과 권력 쟁취라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정확히 부합했던 것입니다.

베트남 호찌민 시내 전경


● 축출 4년 만에 공산당 서기장 선출된 응우옌 반 린

베트남의 경우에도 본격적인 개혁 개방으로의 변화는 응우옌 반 린의 권력 장악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응우옌 반 린은 베트남 통일 이후 호찌민시 서기로 있으면서 각종 개혁정책을 정력적으로 추진해 상당한 성과를 내기도 했으나, 보수파의 반발로 1982년 제5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원 겸 서기직을 박탈당한 채 실각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불과 4년 뒤에 열린 1986년 제6차 당 대회에서 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베트남 공산당 정치사에서 볼 때, 직전 전당대회에서 축출됐던 인사가 다음 전당대회에서 서기장으로 선출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응우옌 반 린의 서기장 선출에는 고르바초프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인데, 1982년부터 소련공산당 내에서 베트남에 관한 일체를 담당하던 고르바초프는 베트남 개혁을 위해 응우옌 반 린이 1985년 다시 정치국원으로 복권되고 1986년 서기장으로 선출되는 데 있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응우옌 반 린은 이 같은 과정을 통해 서기장직에 올랐기 때문에 개혁정책을 통해 집권의 정당성을 설파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응우옌 반 린이 개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당시 베트남이 처해 있던 경제적 상황에 있었습니다. 베트남 공산당은 1975년 무력에 의한 통일을 이룬 이후 북베트남의 사회주의 노선을 남쪽에다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급진적 통일전략을 실행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1980년대 중반 베트남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20개국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하는 처참한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위기에 처한 베트남 지도부는 어떻게든 타개책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베트남 공산당은 1986년 제6차 당대회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그동안의 실책과 무능에 대해 스스로를 비판했습니다.

베트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정치보고서에 의하면, 공산당 지도부는 경제 사회적인 지도력의 실수와 역부족이 당의 사상적이고 조직적인 활동 부족과 간부들의 노력 부족 때문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인구는 급증하는데 농업과 제조업의 생산량은 거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으며, 국가 생산은 사회적 소비를 충족시키기에 불충분하고, 노동자들의 생활은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체제 실패에 대한 반성문이 공산당 보고서에 명문화됐습니다. 응우옌 반 린의 공산당 서기장 선출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던 것입니다.

베트남의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응우옌 반 린으로서는 개혁을 통해 베트남 인민들에게 희망을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무능력한 전임 공산당 노선에 대한 비판 위에서 개혁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지지세력 확산과 정치적 이득이 되었음은 물론입니다. 개혁정책을 추진하다 숙청됐던 린으로서는 전임 공산당 지도부의 과오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기 때문에 전임 노선을 비판하는 데 따른 부담도 가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 지도자 교체 없는 개혁 개방은 가능한가

이상에서 살펴본 중국과 베트남의 개혁 개방은 다음과 같은 정치적 환경 속에서 이뤄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했고, 둘째 전임자 혹은 전임 노선과의 차별성을 부각하며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새로운 지도자에게 정치적 이득이 되는 조건에서 과감한 개혁 추진이 가능했습니다.

다른 나라의 예를 오래 들어 다소 지루했을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전임 노태우 정부의 여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습니다. 야합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3당 합당에 응해 당시 여당인 민자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돼 대선에서 야당의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것입니다. 따라서 형식적으로 보면 노태우 정부의 정권 재창출이 이뤄진 것이었는데, 김영삼 정부의 출범 이후의 행보는 이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자신의 정부를 '문민정부'라는 별칭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문민정부'라는 것은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정부와는 분리된다는 뜻으로, 전임 정부와의 차별성을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여당의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됐으면서도 전임 정부를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전임 정부와의 차별화를 시도한 것입니다.

전임 정부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초기 하나회 척결과 금융실명제 실시 등 과감한 개혁조치들을 취해나갔습니다. 5·18특별법을 제정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우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개혁조치에 힘입어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은 한때 90%에 육박하기도 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이러한 과감한 개혁조치를 취했던 것은 기본적으로 오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쌓아 온 개혁에 대한 신념이 바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만 현실 정치라는 차원에서 보면, 전임 정권과의 차별화를 통해 과감한 개혁조치를 취하는 것이 국민적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정치적 이해관계와 부합한 측면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만약 노태우 정부의 계승을 강조하며 현실에 안주하려 했다면 민주화운동 세력의 반발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고 취임 초기 엄청난 지지율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정치인에게 있어 과감한 개혁은 정치적 이해관계와 떨어뜨려 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전임자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것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부합한다고 할 때 정치인은 과감한 정책 전환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 전임자 계승에서 정당성 나오는 김정은 권력

이제 우리의 관심인 북한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북한은 중국이나 베트남 같은 과감한 수준의 개혁 개방을 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하기 위해서는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가 전임 정권과 차별화될 정도로 과감한 정책 전환을 하는 것이 김 총비서에게 정치적 이득이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김 총비서의 권력 기반을 보면 이 질문에 긍정적 답변을 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누구나 알다시피 김정은 총비서는 김일성의 손자이고 김정일의 아들이기 때문에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북한의 후계자론은 후계자의 품격과 자질에서 핵심을 이루는 요소가 '수령에 대한 충실성'이라고 말합니다. 후계자의 정당성 기준을 수령인 김일성을 얼마나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느냐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김 총비서가 김일성, 김정일의 후계자가 된 것은 이른바 백두혈통으로 김일성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고 인정받았기 때문이며, 실제로 김 총비서는 집권 이후 김일성을 모델로 한 이미지 정치를 자주 활용하고 있습니다. 덩샤오핑이나 응우옌 반 린이 전임자와의 차별을 기반으로 지지 세력을 넓히고 권력을 확고히 하는 구조였다면, 김정은의 권력은 기본적으로 전임자를 계승하는 데에서 정당성을 확보하는 구조인 것입니다.

현실정치라는 측면에서 볼 때, 급격한 정치적 환경의 변화 없이 과거와 확연히 구분되는 과감한 정책 전환이 이뤄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정치적 이득인 지도자가 자신의 권력기반이 흔들릴 수 있는 위험성을 감수하면서까지 외부와의 소통을 추구하는 개혁 개방에 적극적일 것이라고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김정은 총비서가 일부 개혁 개방을 시도할 수는 있겠으나 그 범위는 지난 글(▷ [안정식 기자와 평양 함께 걷기] 김일성의 나라 북한, 북한은 개혁 개방을 할 수 있을까? ③)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한계 안에서 이뤄질 것이며 북한이 본격적 의미의 체제전환 단계로 들어서는 것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 원문 링크 : https://news.sbs.co.kr/d/?id=N1006203059 ]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중국과 베트남의 변화에 비견될 정도로 북한이 과감한 개혁과 대외 개방을 하는 것이라면, 전임자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것이 정치적 이득이 되는, 적어도 부담스럽지 않은 새로운 지도자의 등장 없이 북한의 과감한 변화가 가능할 것인지 의문입니다.

(사진=조선중앙TV 화면, 연합뉴스, 게티이미지코리아) 

안정식 기자cs7922@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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