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동물원] 휴 잭맨은 가라, '진짜 울버린' 납시었다
곰, 늑대, 족제비 등 맹수 장점 고루 갖춰
마리당 세력권이 서울 면적 육박
울버린이 돌아왔습니다! 이 말에 많은 독자들께서는 할리우드의 근육질 중년 배우 휴 잭맨의 얼굴부터 떠올릴 것입니다. 2000년 첫 작품 ‘엑스맨’에서 2017년 마지막 ‘로건’에 이르기까지 9편의 엑스맨 시리즈에서 돌연변이 괴수이자 영웅 캐릭터 ‘울버린’을 연기한 그 휴 잭맨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얘기할 울버린은 사람이 연기한 가공의 캐릭터가 아닌, 진짜 울버린입니다.
외계금속이 주입된 강력한 골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손가락 사이에서 칼날이 솟아나지도 않고, 어지간한 상처는 가뿐히 극복하는 불가사의 회복력이 있지도 않지만, 그 모든 환타지를 가뿐하게 제압하는 용맹함과 전투력, 야성으로 무장한 맹수 울버린 말이죠. 이쯤되면 적잖은 분들이 궁금해할 것입니다. 울버린이 정말 짐승이었어? 네. 진짜 짐승 맞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가공의 동명 캐릭터에 가려져 정작 존재감이 스멀스멀한 비운의 짐승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휴 잭맨 조차 첫 촬영 직전까지 울버린이라는 짐승이 있다는 걸 몰랐다고 나중에 토로했을 정도입니다. 늑대(wolf)랑 철자가 비슷해 늑대의 변종 캐릭터 쯤으로 알고 늑대 연기에 몰입중이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덜 알려진만큼 신비롭고 매력적인 짐승입니다. 이 울버린이 최근 미국의 대표 국립공원 옐로스톤에서 동영상 카메라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동안 2006년부터 2009년 사이에 수컷 5마리와 암컷 2마리의 서식 사실이 확인됐다는 미 국립공원관리공단(NPS)의 조사 결과가 있긴 했지만 움직이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되는 일은 아주 드문 사례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야간 감시 카메라에 등장하는 울버린의 등장 시간은 불과 1초 남짓. 하지만 두 눈에 광채를 뿜으며 눈 덮인 숲속을 달려가는 모습은 그 어떤 ‘엑스맨’ 시리즈보다도 생생하고 실감납니다.
이 감시카메라는 애당초 옐로스톤의 최상위권 포식자 퓨마의 서식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설치됐지만, 더 귀한 손님과 만난 셈이죠. 울버린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옐로스톤 뿐만이 아닙니다. 북서부 워싱턴주의 레이니어 국립공원에서도 작년 8월 근 1세기만에 울버린이 발견됐습니다. 그것도 새끼 두마리를 돌보고 있는 암컷이었죠. 영상과 화면에 포착된 울버린의 모습은 영화에서처럼 돌연변이 같은 느낌을 줍니다. 분야별 맹수들의 장점만 조합한 듯한 외모거든요.
짙은 갈색 위주의 털빛깔은 영락없는 불곰과 흡사합니다. 하지만, 툭 튀어나온 코와 으르렁댈 때 드러나는 날카로운 이빨은 마치 늑대나 여우 같은 개과 맹수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분류학상으로 울버린은 수달·담비·오소리·밍크 등과 같은 무리인 족제비과입니다. 이 족속들은 몸집은 작지만 민첩한 몸놀림과 타고난 사냥실력과 왕성한 먹성으로 이름났습니다. 몸길이가 최대 1.2m, 몸무게는 20㎏까지 자라는 그래서 울버린은 ‘세계에서 가장 큰 족제비’입니다. 울버린의 상차림에는 작은 설치류나 새 뿐만이 아니라 집채만한 덩치의 와피티 사슴도 포함돼있고, 심지어는 지상 최대의 사슴인 말코손바닥사슴까지도 공략하는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마땅한 먹잇감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는 사체의 썩은 고기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 모습은 설원의 하이에나입니다. 이렇게 여러 육식동물들의 장점만을 조합한 듯한 울버린에게는 또 하나의 무기가 있습니다. 몸에서 풍기는 지독한 냄새입니다. 울버린에게 따라붙는 별칭 중의 하나가 ‘스컹크 곰’이라고 하니 냄새의 강도를 짐작할만합니다. 냄새는 다른 육식동물들의 접근을 막는 동시에 자신의 세력권을 과시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강렬한 외모와 드센 성질 때문에 울버린은 예로부터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토템 신앙에서도 용맹함과 불굴의 끈기의 상징으로 대접받아왔습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작은 덩치에도 불구하고 북미대륙 맹수계에서 울버린은 곰·퓨마·늑대·코요테와 함께 ‘빅5’를 형성합니다.
하지만, 울버린을 연기하는 배우가 ‘울버린이란 짐승이 진짜 있었느냐’고 되물을 정도로 인지도가 뒤처지는 이유는 뭘까요. 그건 은둔에 가까운 이들의 생활 습성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울버린은 번식과 새끼 키울 때를 제외하면 철저히 숨어서 외롭게 살아갑니다. 개체당 행동반경의 넓이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옐로스톤에서 관찰된 울버린의 경우 암컷 두 마리의 평균 행동 반경은 447㎢였고, 수컷 세마리의 평균 행동 반경은 908㎢ 였습니다. 서울시 면적이 605㎢니 이들이 얼마나 드문 드문 살아가고, 또 얼마나 활발하게 돌아다니는지 짐작이 갑니다. NPS는 알래스카와 하와이를 제외한 미국 본토 전체에 살고 있는 울버린 숫자가 많아야 1000마리를 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울버린의 발견 소식이 주목받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지구촌의 공통의 근심거리인 기후 변화와 긴밀하게 연관있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울버린의 서식지는 북미와 시베리아, 스칸디나비아 반도, 그리고 중국과 몽골 등에 걸쳐있는 알타이산맥까지 뻗어있습니다. 거칠고 황량한 겨울 날씨에 적응하며 진화해왔습니다. 하지만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온난화로 서식지 파괴가 우려된다는 점에서 울버린은 북극 얼음이 녹아없어지며 멸종위기에 내몰린 북극곰과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는 걱정도 나옵니다. 그런 면에서 울버린의 건재는 지구촌 북쪽의 삼림과 동토 지대가 아직까지는 제 기능을 하고 있다는 일종의 청신호로 받아들여지는 측면도 있습니다. 휴 잭맨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출연한 엑스맨 시리즈 ‘로건’에서 늙고 초췌한, 그래서 더욱 공감이 가는 울버린을 연기해 ‘저토록 인간적인 야수가 있었나’라는 호평을 얻어냈습니다. 야생의 진짜 울버린만큼은 생기 넘치고 혈기 왕성한 야성을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서식지를 잃고 먹잇감을 찾지 못해 바짝 말라 절멸로 내몰리는 일 없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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