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처는 수사·기소 분리한다지만..영국 사례는 정반대
영국의 중대부정수사처(SFO)는 영국 법무부의 통제를 받고 고위직 수사가 아닌 기업 수사만 하는 등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와 전혀 다른 성격의 기관인 것으로 분석됐다. 또 수사와 기소는 함께 가야 한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출범한 기관인 것으로 나타났다.
SFO는 공수처처럼 검찰과 기소권을 나눠 갖고 수사도 하는 유일한 해외 사례로 꼽힌다. 이에 우리 법무부와 여권 등은 공수처와 비슷한 해외 사례로 SFO를 주로 지목해왔지만 두 기관은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많다.
17일 서울경제는 영국 법무부의 ‘법무부와 중대부정수사처장 사이의 기본 협약(Framework Agreement between the Law Officers and the Director of Serious Fraud Office)’ 문건 등을 토대로 SFO와 공수처를 비교 분석했다. 2019년 1월 마지막으로 개정된 이 협약은 중대부정수사처장의 사건 수사 개시 요건, 수사 방식, 법무부와의 협력 관계 등에 대해 72개 세부 조항에 걸쳐 규정하고 있다.
SFO는 수사권과 기소권을 둘 다 가진 국가기관이라는 점 외에는 공수처와 거의 모든 것이 전혀 다른 것으로 평가된다.
먼저 SFO는 기업 사기 및 횡령 등 기업 범죄와 금융 범죄를 수사한다. SFO는 기업 사건 수사 중 고위공직자가 연루된 것을 파악하면 그 역시 수사 대상으로 삼을 수 있지만, 주 업무와 존재 이유는 기업·금융 사건 수사다. 고위공직자 범죄만 수사하는 공수처와는 아예 분야가 다른 것이다. SFO는 그동안 각종 대형 금융기관, 담배 회사, 석유 회사 등의 뇌물 사건 등 굵직한 수사들을 해왔다. 최근에는 에어버스 뇌물 사건에 대한 국제적 수사에도 관여했다. 금태섭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서울경제와의 통화에서 “SFO를 직접 방문해 회의를 하면서 SFO 차장이 내게 ‘고위공직자를 수사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며 “태생적으로 공수처와 SFO는 달라 단순 비교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금 전 의원은 공수처 출범 전 자비를 내고 직접 영국을 가 SFO 검사들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또 주요 차이점은 SFO는 영국 법무부 소속이라는 것이다. 공수처법에 따라 법무부나 청와대 등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공수처와는 다르다. SFO는 법무부와 수시로 소통하고 협의해야 할 의무를 이행한다.
‘법무부와 중대부정수사처장 사이의 기본 협약’은 SFO가 독립성을 보장받는 동시에 법무부와 충실한 협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협약의 2번 조항은 법무부와 SFO의 관계에 대해 “상호협력적인 정신과 존중을 바탕으로 서로의 업무에 최대한의 지원을 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이어 13번 조항은 “중대부정수사처장은 SFO의 수사와 기소 대한 모든 업무에 독립적 결정을 내릴 수 있으나 법무부 장관과의 상의를 해야 한다”고 돼있다. 협력적 관계를 바탕으로 법무부와 사건 수사 및 기소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누도록 하는 것이다.
공수처장이 누구와도 협의를 할 필요가 없이 고위공직자를 수사할 수 있다는 점은 여야에서 모두 우려하는 부분이다. 공수처는 국회 국정감사 대상이 돼 간접적으로 국회의 통제를 받기는 하나, SFO처럼 제3 기관과 수시로 협의하거나 통제받지는 않기 때문이다. 특히 사건 이첩권이 있는 공수처장은 검찰이 수사하는 고위공직자 범죄 사건을 넘겨받을 수 있는데 이 권한은 현행법상 통제받지 않는다. 이런 우려를 감안해 김진욱 공수처장은 검찰과 충분한 협의와 논의를 거쳐 이첩 기준을 마련하겠다고 강조하고 있다. 중대부정수사처장도 사건 이첩권이 있는데, ‘법무부와 중대부정수사처장 사이의 기본 협약'에 따라 타기관 및 법무부와의 충분한 상의와 협력 하에 권한 행사가 가능하다. 공수처와 검찰도 이같은 협약 등의 형태로 사건 이첩 기준을 명시화 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 협약은 반대급부로 중대부정수사처장의 독립적 권한을 강조한다. 협약 19번 조항과 42번 조항은 “법무부 장관은 SFO가 독립된 수사와 기소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한다. 정리하면 중대부정수사처장은 독립적으로 수사 개시와 기소를 결정할 수 있지만, 법무부 등 타기관과 충분한 협의를 하고 의견을 고려하는 것이다.
SFO가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했지만, 수사부와 공소제기를 하는 공소부의 협업은 필수로 본다는 것도 공수처와 큰 차이점이다. 공수처는 수사와 기소의 분리에 방점을 두고 있다면, SFO는 수사 주체와 공소 제기 주체는 필연적으로 협업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다.
SFO도 공수처와 같이 수사검사와 공소를 제기하는 공소검사가 나뉘어져있다. 수사는 수사검사가 하고 재판에서 공소유지는 공소검사가 한다. 그렇지만 수사검사와 공소검사들은 수사 착수 단계부터 협업하도록 돼 있다. SFO는 이에 대해 “경찰 등 수사기관이 수사해 범죄 증거를 검찰에 넘기면 검찰이 기소하는 영국의 일반 형사사법시스템과는 다른 모델”이라며 “복잡한 기업 사건은 수사검사와 공소검사의 ‘강력한 협력 관계’가 처음부터 있어야만 범죄 혐의를 소명하고 이를 재판에서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수사와 기소의 조화는 영국에서 ‘로스킬 모델’로 명명됐다. SFO 설명에 따르면 1970~1980년대 영국은 기업 사건 및 금융 사건 등 복잡한 범죄 사건에 한해 수사와 기소를 함께 책임지는 국가기관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있었고, 1986년 이런 내용을 담은 ‘로스킬 보고서’를 토대로 국회와 정부가 제도화 작업에 들어가 2년 뒤인 1988년 SFO가 출범한 역사가 있다.
이를 토대로 보면 우리 법무부와 여권 및 공수처 찬성 진영은 해외의 참고 모델 중 하나로 SFO를 얘기해왔지만 정작 SFO의 수사·기소 협력 원칙은 우리 법무부가 추진하는 수사와 기소 분리와는 전면 배치된다.
공수처는 현 정부 수사 기소 분리 추진 방침에 발맞춰 수사부와 공소부를 분리해 기소권 남용을 방지하려는 시스템을 마련했다. 공수처의 수사부가 수사 결과를 공소부에 전달해 공소부가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구조다.
수사·기소 분리에 대해 검찰 내에서는 ‘이론적으로는 돼도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검찰의 한 특별수사 전문 관계자는 “복잡한 기업 사기 사건 등은 압수수색 과정에서 어떤 증거를 왜 확보했는지, 소환조사에서 핵심 사건 관계인들이 어떤 얘기를 했는지 등 수많은 절차를 직접 챙겨야지만 재판에서 공소 유지를 겨우 할 수 있다”며 “기업 총수 측 대규모 변호인단과 치열한 법리다툼을 해야 하는데, 해당 사건이 어떻게 수사가 진행됐는지 일거수일투족을 모르는 검사가 재판에 들어가면 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영국은 이러한 문제점을 1980년대부터 논의해 복잡한 기업 사건에 한해 수사와 기소를 합친 셈이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기소권 남용 방지를 하겠다는 취지인 수사와 기소 분리 방침이 수사와 기소 둘 다 어렵게 만드는 방향으로 변질돼서는 안 된다”며 “견제·협력의 조화가 있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진욱 공수처장이 인사 청문회에서 언급했던 SFO의 모의재판(Deferred Prosecution Agreement) 제도가 공수처에 도입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김 처장은 “SFO는 수사팀과 외부 변호사들이 모의재판을 통해 기소하는 절차가 있어 참고할 만하다”고 말한 적 있다. SFO는 사건에 대한 수사를 마무리하고 기소 여부를 결정하기 전 피의자 측과 판사를 불러 모의재판을 하는 제도를 지난 2014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모의재판 결과 SFO와 피의자 측의 합의가 있으면 피의자는 기소유예 된다. 기소유예는 다만 개인은 안 되고 법인만 가능하다. 모의재판의 협의 쟁점은 해당 기업의 범죄 행위로 인한 피해가 복구가 가능한지, 즉 배상금액을 얼마큼 낼 수 있는지 등이 핵심이다. 이 제도는 영국 검찰도 하고 있다. SFO는 해외 유관기관들과 공조수사를 하기도 하는데, 지난해 1월에는 SFO와 미국 법무부, 프랑스 경제전담검찰(PNF)의 수사를 받은 항공기 제조 회사 에어버스는 36억 유로(4조6,640억원)를 벌금으로 내기로 하고 기소 유예를 받았다.
SFO 모의재판이 범죄를 저지른 기업을 상대로 배상금 등을 결정하는 절차인데 이 제도를 공수처가 도입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할지도 주목된다. 김 처장이 처음 모의재판 도입을 검토해볼 만하다고 얘기한 것은 피의자가 받는 혐의를 법원 공판 전 일차적 판단을 받아봄으로써 기소권 남용을 방지하겠다는 취지인데, SFO 모의재판은 혐의에 대한 다툼보다는 피의자가 혐의를 인정하는 상태에서 배상금을 결정하는 절차라 둘은 다르다. 혐의를 받는 기업이 모의재판을 받으려면 수사를 받는 단계에서 SFO에 전면적인 협조를 해야 한다는 의무조항도 있다.
공수처 내에서도 모의재판 도입 방식은 사실상 어렵지 않겠느냐는 시각이 우세한 것으로 알려졌다. SFO가 450명 규모의 기관이라 모의재판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반면 검사 25명이 전부인 공수처는 물리적으로 모의재판 방식을 채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대신 공수처는 외부 전문가들의 제3자 시각을 수사와 기소에 반영할 수 있는 검찰의 수사심의위원회 제도를 따와 ‘사건평가위원회’를 만드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손구민 기자 kmsoh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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