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고금평의 열화일기] 1인치 깊이가 만드는 '최고의 선택'

김고금평 에디터 2021. 2. 17.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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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루해 보이던 A부장에 대한 편견이 깨진 건 어느 식사 시간 꺼낸 짧은 대화 덕분이었다. TV, 특히 예능은 쳐다볼 것 같지도 않던 그가 매주 아들과 함께 뮤지션이 나오는 예능을 본다는 얘기를 꺼내며 화색이 도는 표정을 지었을 때, 음악계를 오래 취재해온 필자에겐 그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 프로를 단순히 ‘재미있다’ 정도로 표현하지 않고 뮤지션의 음정, 박자, 화음까지 꺼낼 땐 대화 이면의 ‘그’를 다시 보게 됐다.

사회에 불만이 넘쳐 보이던 B부장이 ‘책벌레’라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그가 보여준 열정의 ‘속사포 대화’가 한몫했다. 깨알같이 적은 수많은 독후감을 보여주며 ‘같이’ 무엇을 하자고 쉼 없이 제안할 땐 ‘따뜻한 욕쟁이 데스크’라는 기존의 이미지 대신 ‘냉정한 지혜의 샘물’ 이미지가 스쳤다.

새로 신설된 에디터제에 합류한 회사 데스크들의 몰랐던 진면목들이다. 에디터 중 홍일점인 C에디터의 ‘자립’과 ‘인내’를 키워드로 한 자식 교육 얘기를 들을 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우리는 상대방의 1인치에 더 다가가기 전, 그간 보여준 어떤 패턴과 일상적 행동으로 ‘그’를 쉽게 판단하려는 선입견에 함락되는 경향이 적지 않다. 그 선입견 위로 한 발짝, 또는 1인치만 더 들어가면 완전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사실을, 어쩌면 알면서도 어쩌다 놓친다.

예전 탤런트 차인표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 그의 사무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문을 열고 인사를 나누는데, 그가 던진 한마디가 아직도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다. “점심 식사하셨어요?”라고 그가 물었고 당연히 “네”라는 대답으로 첫 대면의 순간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다시 “뭐 드셨어요?”라고 재차 물었다. 나는 당황했다. 그 같은 질문을 어느 유명 연예인이나 공인에게서 받아본 적이 없었다.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또렷이 기억했지만, 그 질문에 명확한 대답을 하지는 못했다. 그런 상황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1인치 더 깊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세상 너머의 세상을 발견하는 일일 수 있다. 그것이 비록 작은 세상일지라도, 나에게 영향을 주고 나를 변화시키고 나를 자극하는 순간인 셈이다. 그 순간들이 모이면 얼마나 폭발적인 힘이 될 수 있을까 그런 기대를 품으면 행복감도 밀려드는 것 같다.

기자 같이 막연한 기대감을 안은 이들에게 행복한 결과를 보여주는 어떤 실험이 진행됐다. 댄 애리얼리 등으로 대표되는 행동경제학자들이 시장적 규범과 사회적 규범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펴보는 실험이다.

시장적 규범에선 모든 사람이 철저하게 비용과 편익을 분석하며 자기 이익을 극대화한다. 사회적 규범에선 따뜻하고 융통성 많은 세상에서 사회적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걸 제일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그래서 도움 주고받는 게 일상이다.

실험은 컴퓨터 모니터에서 동그라미를 네모 안에 넣는 단순한 반복 작업을 통해 누가 최대한 빠르게 과제를 수행했는지 알아보는 식이다. 연구자들은 이를 위해 세 그룹으로 나눴다.

대부분의 피실험자들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조건밖에 모른다. 보수를 지급하지 않는 통제집단 하나, 보수를 많이(4달러) 그리고 적게(10센트) 각각 지급하는 실험집단 둘로 나뉜 실험의 결과는 어땠을까.

10센트 집단은 101개, 4달러는 이보다 50%나 많은 159개를 성공시켰다. 역시 돈을 많이 받은 집단은 ‘시장성의 논리’에 따라 더 좋은 성적을 보였지만, 최고의 성적은 아니었다. 가장 높은 점수를 획득한 집단은 의외로 보수를 받지 않은 통제집단이었다. 무려 168개를 성공시킨 것이다.

이 결론에 굳이 극단적인 해석을 달자면, 이렇다. 10센트 집단은 “내 시간의 가치가 겨우 이 정도야?”라고 말할 법하고, 돈을 안 받은 집단은 “내 시간을 쪼개서 도왔더니 뿌듯해” 정도로 설명이 될 듯하다.

10센트라도 돈이 개입되는 순간, 그 과제는 ‘돈 받고 하는 노동’으로 인식돼 받은 돈 만큼 일하기 십상이고, 돈을 안 받은 집단은 ‘선의’가 강조된 사회적 규범의 힘이 촉발돼 기대 이상의 결과가 나온 셈이다.

사회적 규범은 촘촘한 계약과 거리가 멀다. 충성심, 공감, 융통성 그리고 이해심 같은 가치들이 은연중 배어있다. 사회적 세상에선 대화하다 자기와 비슷한 사람에게 직관적으로 이끌리거나, 선입견을 깨부술 열린 소통의 기회도 적잖게 발생한다. 그렇다고 최고의 선택이 늘 ‘사회성’에 기울어져 있는 건 아니다. 때론 이성과 계산이 투영된 ‘시장성’을 앞세워야 할 때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사회성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점심으로 뭘 드셨어요?”라는 누군가의 1인치 더 가까워지려는 관심 앞에 왠지 모르게 뜨거워지는 내 심장의 온도를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일 나눌 1인치 더 깊은 대화가 무엇일지 새로 고민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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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금평 에디터 danny@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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