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는 기억조차 못할텐데.." 지울 수 없는 상처 '학폭'

유지혜 2021. 2. 17.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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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된 후에도 트라우마 남아
신뢰 결핍.. 사회생활 부적응도
"응당한 처벌·진정한 사과 필요"
두 아이의 엄마인 직장인 A(33)씨는 요즘 자주 악몽을 꾼다. 누군가에게 쫓기거나 놀림거리가 되는 꿈이다. A씨를 괴롭히는 이들의 얼굴은 나오지 않지만, 잠에서 깨면 늘 같은 얼굴이 떠오른다. 16년 전, 고등학생인 A씨를 따돌리고 괴롭히던 같은 반 아이들이다.

잊고 살려 했던 기억이 불쑥 떠오른 건 최근 학교폭력 폭로가 잇따르면서다. A씨는 “평소 멀쩡하게 봤던 이들이 학교폭력 가해자라는 것을 보니 날 괴롭혔던 아이들도 지금 어딘가에서 멀쩡한 척 살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동안 상처를 잊은 척 살았지만 사실은 하나도 잊혀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도 너무 괴롭다”고 토로했다.

최근 배구선수 이재영·다영 자매 등 유명인의 학교폭력이 잇따라 폭로되면서 학교폭력의 심각성과 폐해가 재조명되고 있다. 많은 피해자들은 평생에 걸친 트라우마가 남았다고 말한다. 가해자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과 피해자에 대한 사과가 이뤄져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잇따른다.

16일 다수 논문에 따르면 학교폭력 피해 학생들은 우울과 불안, 예민함 등의 피해를 공통적으로 호소했다. 특히 장기간 피해를 본 학생들은 자아 존중감이 낮아지고,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피해 경험은 타인에 대한 경계나 신뢰 결핍으로 이어져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방해하기도 했다.

지난해 발표된 논문 ‘학교폭력 피해 경험이 사회불안에 미치는 영향: 거부민감성의 매개효과’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타인에게 거부당하는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부민감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학창 시절 반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는 B씨는 “원래 활발했는데 따돌림을 당한 후 성격이 많이 변했다”며 “사회생활을 할 때도 ‘저 사람들이 날 안 좋게 보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들 때가 있다. 트라우마가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피해자 C씨는 “나를 괴롭혔던 애들이 대기업에 다니거나 공무원이 됐다는 소식을 접할 때면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는 “아직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괴롭다”며 “정작 가해자들은 잘사는 것을 보면 억울하다”고 심경을 털어놓았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최근 유명인들을 대상으로 한 학교폭력 폭로는 성인이 되어서까지 남는 트라우마 때문”이라면서 “피해자들은 과거에 겪은 억울함과 상처 등을 지금이라도 치유하고 사과받고 싶어 폭로에 나선 것”이라고 밝혔다.

피해자는 계속 나오고 있다. 교육부 조사에 따르면 학교폭력을 당했다는 응답은 2017년 0.9%(약 3만7000명)에서 2019년 1.6%(약 6만여명)까지 늘었다.

전문가들은 학교폭력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사회가 적극 대처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승재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학교폭력은 지능화·조직화해 성인들의 폭력과 비교해도 죄질이 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이럴 때는 형사사건으로 취급해 공권력이 적극 개입해야 한다. 폭력이 발생했을 때 가해자에 대한 조치가 제때 이뤄지는 것이 트라우마 등 2차 피해를 막는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이재영(오른쪽)·이다영 자매가 지난해 열린 프로배구 컵대회에서 경기 뒤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 뉴스1
◆배구서 깨진 ‘침묵의 카르텔’ 다른 종목으로도 확산 조짐

겨울스포츠 최고 인기스타에서 학교폭력 가해자로 전락한 이재영· 다영(25·이상 흥국생명) 쌍둥이 자매의 파문이 좀처럼 식지 않고 있다. 이들은 지난 10일 과거 학교폭력 전력이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폭로된 뒤 많은 사회적 지탄을 받았고, 결국 15일 소속팀과 국가대표팀으로부터 무기한 출장정지라는 징계를 받기에 이르렀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한국 여자대표팀 주전 세터로 뛰며 ‘2대 연속 국가대표’로 화제를 모은 자매의 모친 김경희씨도 함께 비판을 받았다. 부모의 입김 속에 이들이 학창시절 경기 등에서 과도한 권력을 행사했다는 것. ‘쌍둥이를 국가대표로 키운 어머니’라는 부러움을 샀던 김씨는 이제 ‘경기에 관여한 어머니’로 비판의 중심에 섰다. 하루 전에는 대한민국배구협회가 김씨에게 수여한 ‘장한 어버이상’도 취소되는 등 가족 모두가 추락했다.

여기에 이들 폭로가 방아쇠가 돼 송명근(28), 심경섭(30·이상 OK금융그룹) 등 남자선수의 학교폭력 전력까지 드러났고, 이들도 마찬가지로 국가대표팀에서 무기한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들의 향후 지도자 생활에도 큰 걸림돌이 놓이게 됐다. 대한민국배구협회는 “학교폭력 가해자로 판명된 선수는 지도자 자격을 획득할 때도 결격 사유가 생긴다. 지도자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중징계 경력은 제한 사항이 된다”고 전했다. 가해자들이 모두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격을 얻는 데 ‘학교 폭력 이력’은 엄청난 감점 대상이 돼 이들이 학교나 프로팀 등 협회 산하 단체의 지도자로 활약할 가능성이 크게 줄었다.

이런 극적인 몰락을 해외 언론들도 놓치지 않았다. 영국의 ‘데일리 메일’은 15일(현지시간) “쌍둥이 배구 스타가 과거 학교폭력이 알려지면서 국가대표팀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다”는 제목으로 소식을 전달했다.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도 이들의 이야기가 보도됐다. SCMP는 자매가 다수의 TV 예능 프로그램과 자동차 광고 등에 출연하며 유명인 지위를 누렸지만, 이들이 나온 프로그램과 광고 영상은 재빠르게 삭제 조처됐다고 설명했다.
학교폭력 전력이 드러나 프로배구계에 파문을 일으킨 이재영·다영 쌍둥이 자매의 소식이 전세계 언론에 속속 보도됐다. 사진은 자매의 뉴스를 다룬 영국의 데일리메일 캡처.
이들의 부끄러운 소식이 전달되며 한국 스포츠의 어두운 일면까지 속속 드러났다. 데일리 메일은 한국이 하계·동계 올림픽 10위 안에 드는 스포츠 강국이지만, 신체·언어적 폭력이 만연하다면서 최숙현(철인 3종), 심석희(쇼트트랙) 등의 사건을 사례로 소개했다. 배구계 전체가 발칵 뒤집히며, 해외에까지 뉴스가 보도될 지경이지만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추가 폭로도 제기됐다. 수도권 소재 모구단 인기 선수에 대한 폭로가 지난 14일 온라인상에 올라왔고, 하루 뒤에는 해당 선수가 피해자에 연락해 폭력 행사 진위를 놓고 항의했다는 글까지 추가로 게시됐다. 16일에는 서울 소재 구단의 신인 선수의 초등학교 시절 폭력 행사 전력이 도마에 올랐다.

다른 프로 종목에도 ‘학폭 미투’가 번지는 양상이다. 프로야구에서는 이미 키움 안우진이 2018년 학교폭력 문제로 50경기 출장정지 징계를 받았다. 지난해 NC는 1차 지명했던 김유성을 문제가 불거지자 지명 철회했고, 결국 김유성은 프로 진출이 좌절됐다. 또한, 지난해 신인드래프트 당시에도 몇몇 선수들이 학교폭력 문제가 제기됐고 지명이 유력했던 선수들이 프로 구단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프로농구의 경우 이번 사태가 벌어지면서 각 구단을 통해 조사에 들어간 상태지만 확인이 불가능한 부분이 많아 난감한 상황이다. 프로야구나 프로농구 등 다른 종목들도 피해자의 폭로가 나오기 전에는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시한폭탄을 안고 가는 형국이다.

결국, 사태를 촉발한 프로배구가 대책 마련에 나섰다. 한국배구연맹(KOVO)은 16일 ‘배구계 학교 폭력 근절 및 예방을 위한 비상대책회의’를 연 뒤 학교폭력 연루자에게 최고 영구징계를 내릴 수 있는 규정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신무철 KOVO 사무총장은 “신인 드래프트 시 학교폭력과 관련한 서약서를 받고, 향후 서약서 내용이 허위사실로 확인될 경우 영구제명 등 중징계를 내릴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그동안은 선수인권보호위원회 규정 제10조에 따라 강간, 유사 강간, 이에 준하는 성폭력, 중대한 성추행 시에만 영구제명 조치를 내릴 수 있었으나 이번에 학교폭력에도 제명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 다만, 관련 규정은 신설 후 효력을 갖게 돼 이미 가해 사실이 알려진 선수들은 연맹 차원의 징계는 받지 않을 전망이다.
고개 숙인 KOVO 사무총장 신무철 한국배구연맹(KOVO) 사무총장이 16일 서울 상암동 한국배구연맹에서 열린 ‘배구계 학교폭력 근절 및 예방을 위한 비상대책회의’를 마친 뒤 결과를 발표하기에 앞서 고개 숙여 학교폭력 피해자들과 배구팬들에게 사과하고 있다. 뉴스1
◆정부 “학교 운동부 징계이력 통합관리”

프로배구에서 촉발된 학교폭력 문제가 체육계를 강타하고 있는 가운데 문화체육관광부가 운동부 징계이력 통합 관리 등의 관련 대책을 내놨다.

문체부는 16일 프로스포츠 선수 학교폭력 사건과 관련해 “교육부 등 관계 당국과 협의해 학교 운동부 징계이력을 통합 관리해 향후 선수 활동 과정에 반영하겠다”고 전했다. 아울러 문체부는 “대한체육회 국가대표선발규정 제5조에 따라 (성)폭력 등 인권 침해로 징계를 받은 적이 있는 경우 국가대표 선발을 제한한다”며 “향후 관련 규정 등을 통해 학교체육 폭력 예방 체계를 구축해 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문체부는 교육부 등 관계 기관 및 단체와 점검 회의를 개최해 발 빠르게 대책을 마련했다. 하루 전 문재인 대통령이 황희 신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폭력 등 체육분야 부조리를 근절할 특별 노력을 기울일 것을 주문한 데 따른 대응이다.

마침 19일부터 스포츠 인권 보호를 강화하기 위해 개정된 국민체육진흥법 및 시행령, 시행규칙도 이번 대책과 함께 시행된다. 국민체육진흥법은 빙상계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1차 개정돼 지난해 8월 5일부터 시행에 들어갔고, 지난해 7월 지도자와 동료의 폭언·폭행·가혹행위로 극단적 선택을 했던 고(故) 최숙현 선수 사건을 통해 2차 개정을 했다.

새로 시행되는 일명 ‘최숙현법’의 핵심 내용은 △체육인에게 인권침해·비리 즉시 신고의무 부과, 신고자·피해자 보호 조치 강화 △직권조사 권한 명시, 조사 방해·거부 시 징계 요구 등 스포츠윤리센터 조사권 강화 △가해자에 대한 제재 및 체육계 복귀 제한 강화 △상시적 인권침해 감시 확대 및 체육지도자 등에 대한 인권교육 강화 △체육계 표준계약서 도입 및 실업팀 근로감독·운영관리 강화 등이다.

문체부는 이번에 시행되는 제도와 별개로 팀 해체, 계약 거부 등으로 경력 단절 및 은퇴 위기에 처한 선수들에게 전문 조력자(에이전시)를 연계해 훈련 및 대회 참가 등 선수 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안도 마련한다.

유지혜·이희경·이강진·서필웅·송용준 기자 kee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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