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공간 사람] 볏짚을 두른 집.. 부엌과 욕실에서 심신을 치유하다
편집자주
집은 ‘사고 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수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옛날 뛰어난 의원은 사람의 마음을 잘 다스려서 미리 병이 나지 않도록 하였는데, 지금의 의원은 사람의 병만 다스리고 마음을 다스릴 줄 모른다.’ 조선 의학자 구암 허준(1539~1615)은 ‘동의보감’에서 환자의 병보다 마음을 먼저 살피는 것이 의원의 기본이라 했다. 지난해 5월 대구 수성구 만촌동의 주택가 구옥을 고쳐 바꾼 ‘향심재(연면적 130㎡)’는 환자를 먼저 위하는 집 같은 의원이다. 향심재(鄕心齋)는 마음을 다해 생각하고 대접하는 나의 집이란 뜻이다. 향심재를 운영하는 의사 여가야(40)씨는 “이곳은 찾아 오는 사람들과 음식을 나눠 먹고, 대화를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따뜻한 집"이라고 소개했다.
구옥을 고친 의원
가정의학과와 피부과를 전공한 여씨는 일반 병원에서 진료를 보며 기존 시스템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다. 밀려드는 환자를 빨리 봐야 했고, 그 과정에서 받는 상처도 컸다. 아픈 이들의 마음을 깊게 돌볼 겨를 없이 병을 빨리 진단하고 처방전을 끊어줘야 했다. “의사가 여유가 있어야 환자를 잘 살필 수 있는데, 현실에선 어렵더라고요. 돈은 많이 벌었지만 보람은 없었어요. 병원을 나와서 저만의 의료적 가치를 실현하고 싶었어요. 제가 일방적으로 병을 진단해서 치료하기보다 환자들이 스스로 자신 안에 쌓여 있는 것들을 풀어내고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걸 돕고 싶어요.”
그의 진료방식은 여느 의사들과 사뭇 다르다. 1대1 예약제로만 환자를 만나고, 진료시간은 보통 2시간이 넘는다. 그를 찾아온 환자들과 함께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눈다. 직접 요리를 해주기도 하고, 환자들과 케이크나 초콜릿을 함께 만들기도 한다. 환자가 내키면 그림도 그리고, 원하면 운동을 함께 한다. “의사인 친구들조차 제 방식이 ‘그건 먼 미래에나 가능한 일’이라고 해요. 하지만 저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의료라고 생각해요. 의사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잖아요. 환자와 동등한 관계로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를 돕는 의사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공간부터 달라야 했다. 일반 상가 건물 대신 구옥을 선택했고, 내부도 집처럼 구성했다. 설계를 맡은 박솔하ㆍ안광일 건축가(100Aassociates 공동대표)는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의사의 이미지와 거리가 한참 멀었다”며 “집과 같은 안식처로서의 공간을 구현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외관부터 남다르다. 구옥의 타일을 뜯어낸 외벽 위로 인공으로 만든 볏짚을 둘렀다. 커다란 간판을 붙여 한눈에 병원임을 드러내는 기존 병원들과 달리 호기심을 자극한다. 건축가는 “환자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는 얘기를 듣고 병원이라기보다 곡식을 저장해두고 내어주는 곳간을 떠올렸다”며 “그런 정체성을 살리기 위해 볏짚을 사용했다”고 했다. 이름과 외관으로 인해 한식당으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여씨는 “오가는 이들이 여기 뭐 하는 데냐고 물으면 사람마다 달리 설명한다”라며 “차 마시는 데라고 하기도 하고 쉬다가는 곳이라고 하기도 하고, 마음을 치료하는 곳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집처럼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서면 병원이라기엔 너무나 생경한 풍경이 펼쳐진다. 오래된 감나무가 오는 이들을 맞는다. 그 아래로는 돌이 깔린 연못이 있다. 담벼락에서 고양이들이 머리를 비죽 내민다. 여씨는 “이곳에 들어오면 정화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라며 “돌, 바람, 물, 소리, 빛처럼 자연적인 요소들로 치유의 에너지를 담고자 했다”고 했다. 감나무에 감이 열리면 여씨가 직접 따서 환자들과 나누고, 날이 좋을 때는 마당에 캠핑 의자를 펼친다.
진료실 대신 부엌과 욕실
놀라움의 진폭은 내부에서 더 커진다. 마당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오면 1층에 긴 금색 바와 6인용 테이블이 있다. 금색 바 뒤에는 소박한 부엌이, 6인용 테이블 뒤에는 식재료를 보관하는 곳간이 있다. 진료실은 따로 없다. 일반 병원에서의 진료실이 향심재에서는 주방이다. 여씨는 “병원에서 무슨 요리를 하느냐고 하지만 얼마나 어떻게 먹느냐가 건강한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마치 친구의 집에 놀러 와서 맛있는 거 해 먹으면서 얘기를 나누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자리도 정해두지 않았다. 앉고 싶은 곳에 편하게 앉으면 된다. 진료는 자연스러운 대화를 통해 이뤄진다. 이곳에서 요리뿐 아니라 찾아오는 이들에 따라 그림을 그리고, 꽃꽂이를 하고, 뜨개질도 하고, 나무 스푼을 깎기도 한다.
2층에는 거실과 욕실이 있다. 거실에는 환자들이 누워 쉴 수 있게 침상이 놓여 있고, 요가나 발레, 명상을 할 수 있도록 공간을 비워놨다. 둥근 욕조가 있는 욕실은 씻는다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돌보고 치유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다. 여씨는 “단순히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목욕을 하면서 내면을 정화하고, 긴장감을 내려놓는 특별한 경험을 통해 에너지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환자들은 이곳에서 낮잠을 즐기고, 따뜻한 물이 가득 찬 욕조에 몸을 푹 담글 수도 있다.
집 안 어디에서도 의료장비를 찾기 어렵다. 대신 적재적소에 있는 그림과 조각, 가구, 소품 등이 눈길을 끈다. 1층 입구 천장에 드리워진 긴 싸리나무는 병원이 아닌 갤러리에 온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여씨가 유럽을 여행하면서 수집해온 식탁과 의자, 수납장, 조명, 심지어 수도꼭지 등은 유럽의 고풍스런 숙소에 머무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한다. “제가 정신적으로 힘들었을 때 병원보다 미술관에 자주 갔어요. 그림이 묘하게 저에겐 위안이 됐고 마음의 병도 나았어요. 그런 것처럼 꼭 약이 아니어도 자연스럽게 심신을 치유할 방법을 찾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정체불명의, 허상에 가까운 공간이라는 지적도 없지 않다. 앞으로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매일 그가 꿈꾸는 이상에 다가서고 있다. “향심재를 운영하려면 마치 바다에 떠 있는 배처럼 쉴 새 없이 노를 저어야 해요. 하지만 제가 구현하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어요. 매일 아침 대문에 걸려 있는 작은 문패를 보면서 마음을 다잡아요. 오늘도 진심을 다해 여기서 환자들을 돌봐야겠다고요.”
대구 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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