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도 다채로운 '목소리'가 있다
모두가 엇비슷한 목소리로 말하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설마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말 아닌 글의 세계에선 꼭 그렇지만도 않다. 같은 말도 목소리에 따라 맛이 달라지기 마련인데 우리의 문자 생활에서 글의 목소리라 할 수 있는 글꼴(컴퓨터·인쇄용 폰트)은 그리 다양하지 못했다. 글의 본문에 쓰이는 글꼴은 특히 그랬다.
글꼴은 용도에 따라 크게 제목용과 본문용으로 나뉜다. 제목 글꼴의 조건이 주목성이라면 본문 글꼴의 생명은 가독성이다. 서체 디자인 거장 아드리안 프루티거(1928~2015)가 문자를 숟가락에 빗대 지적했듯 정보(음식)를 전달하는 기능에 충실할 뿐 형태로 기억되어선 안 되는 것이 본문 글꼴(숟가락)의 숙명이었다.
그러나 벽은 깨지기 마련. 한글 획 하나, 점 하나의 미세한 변화로 개성을 드러낸 본문 글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변화 이끄는 젊은 디자이너들
이런 변화의 한 축을 젊은 서체 디자이너들이 이끌고 있다. 한글 글꼴 디자인은 장인(匠人)적 노력이 요구되는 반면 시장은 한정적이어서 디자이너들이 개별적으로 도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최근 들어 서체 디자인 프로그램 성능이 발달하고 크라우드펀딩(인터넷 소액 모금)으로 제작비를 사전에 충당할 수 있게 되면서 개인 디자이너들이 활약할 공간이 마련된 것이다.
본문 글꼴은 한두 글자보다는 단어에서 문장, 문단으로 확대되면서 점차 고유한 인상이 드러난다. 연필 손글씨의 특징을 살린 ‘숨’(디자이너 박한솔)은 명조체처럼 뾰족하지도 고딕체처럼 모나지도 않다. 숨소리처럼 조용한 느낌의 시나 수필, 소설 같은 문학에 어울리는 글꼴이다. ‘담재’는 1930년대 조선일보 본문 활자로도 쓰였던 박경서체의 구조를 참고해 디자인한 세로쓰기 글꼴이다. 디자이너 최지원은 “박경서체의 첫인상처럼 부드러우면서도 획은 단단하다”면서 “차분하고 담담한 분위기의 글에 어울리는 글꼴”이라고 했다.
박진현의 ‘지백’은 오늘날 명조·고딕체의 기틀을 놓은 최정호(1916~1988)의 보진재판 ‘재정회계 용어사전’(1971) 5호 활자를 바탕으로 했다. 사전 글씨답게 멋부린 곳 없이 무덤덤한 분위기가 특징이다. 박진현은 “소설이나 에세이처럼 감성적인 이야기보다는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에 잘 어울린다”고 했다.
◇출판사·글꼴 회사들도 가세
새롭게 등장한 본문 글꼴들의 쓰임새도 확대되고 있다. 지난달 대한출판문화협회 선정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10권에 들었던 민음사의 ‘디 에센셜 조지 오웰’ 본문에는 ‘정체830’이 쓰였다. 서체 디자인 회사 산돌커뮤니케이션이 2019년 이례적으로 디자이너와 출판 관계자들을 초청한 좌담회까지 열어 선보인 글꼴이다. 미국 영화 감독 퀘이(Quay) 형제의 작품 세계를 소개한 ‘퀘이 형제 입문’(프로파간다·2020)은 작년 전주국제영화제 퀘이 형제 기획전에 맞춰 출간한 책. 형제 감독의 작품에 나타나는 마법적이고 기괴한 분위기와 ‘빛의 계승자’ 글꼴의 어두운 판타지 느낌이 맞아떨어졌다고 평가받는다. 산돌과 모바일 게임사 펀플로가 합작한 글꼴이다.
을유문화사는 지난해 창립 75주년을 맞아 본문 글꼴 ‘을유1945’(디자이너 윤민구)를 만들었다. 붓글씨 기반 명조체의 예스러운 느낌을 덜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글꼴이다. 타이포그래피 연구자 유지원은 “시대가 바뀌고 거기에 맞는 새로운 목소리가 표출되는데 글꼴이 그대로이면 그 목소리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면서 “앞으로 더 다양한 글꼴이 필요하다”고 했다. 채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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