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각자도생 세계의 崇中事大
조선의 왕들은 정월 초하룻날 중국 황제에게 올리는 망궐례(望闕禮)를 치렀다. 대궐에 중국 황제를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모신 뒤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군신(君臣)의 예를 갖춘 것이다. 1898년 폐지될 때까지 거른 적이 없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는 성안으로 쫓겨들어간 인조가 명(明) 황제에게 바치는 망궐례 모습이 나온다. 청나라 군대가 성을 포위하고 지켜보는 가운데 인조는 세자와 함께 곤룡포를 휘날리며 춤추고 노래 부른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치욕과 무력감이 극에 달하는 장면이다.
지난 설날 정세균 총리, 박병석 국회의장, 이재명 경기지사 등 정부·여당 인사들이 중국 공산당 선전 매체에 대거 출연해 “감동의 역사” “우정” 등의 표현을 써가며 신년 인사를 하는 동영상을 보면서 불현듯 ‘망궐례’가 떠올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5년 인터넷 망을 통해 중국 네티즌들에게 근황을 전한 적이 있고,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중국 국영 cctv를 통해 새해 인사를 건넨 적은 있다. 그러나 정부·여당 고위급들이 총출동하다시피 한 것은 처음이다. 도종환 의원은 “중·한 수교 29주년이 되는 해”라며 한국보다 중국을 먼저 불렀다. 누가 한·일 관계를 ‘일·한 관계’라고 불렀다면 어떤 봉변을 당했을까.
문 대통령이 앞장서 그 길을 텄다. 2017년 중국 방문 때 “한국과 중국은 운명 공동체” “한국은 작은 나라, 중국은 큰 봉우리”라고 했다. 노골적 친중 선언이었다. ‘3불 약속’은 안보 문제를 중국이 정해주는 대로 따르겠다는 자발적 굴욕이었다. 백령도 코앞까지 중국 경비함들이 드나들어도 항의 한번 못 한다. 대통령부터 이러니 집권 세력 전체가 중국에 굴종하는 것이다.
이런 숭중사대(崇中事大)의 망상을 깨트리는 책이 얼마 전에 나와 화제다. ‘각자도생의 세계와 지정학’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책의 저자 피터 자이한은 세계적인 지정학 전략가. 그의 분석에 따르면 바이든의 미국은 트럼프의 미국보다 더 세계 질서에서 발을 뺄 것이라는 전제 하에 중국은 10년 이내에 실패하고 성공 신화의 종언을 고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중국은 과대평가됐다. 아시아의 우두머리는 일본이 될 것이다.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의 지역 맹주로 낙점했다”고 썼다.
일본의 해군력과 공군력이 중국을 압도하기 때문에 중국은 일대일 싸움에서도 이기기 힘들 것이라고 분석한다. 저자는 “한국은 다시 부상하는 일본과 경제적으로 융합하는 길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당혹스러운 제언이지만 일본의 재부상에 따른 국제 역학 변화에 대비하라는 주문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망궐례를 치르던 바로 그 시기, 때마침 일본에 머물던 조선통신사 일행은 예상치 못한 수모를 겪었다. 당초 사신 파견의 목적과는 달리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모시는 신사인 닛코의 도쇼구(東照宮)를 참배해달라는 막부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눈보라 치는 강추위에 통신사 일행 214명은 도쿄에서 닛코까지 다녀오는 데 일주일 걸렸다. 일종의 양보였다. 청나라와의 관계가 절박한 상황에서 일본과의 관계까지 험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일본 기록은 전한다. 통신사 일행은 1643년, 1655년 두 차례 더 참배했다.
피터 자이한의 전망대로 ‘미국이 빠져나가고 막강한 해상력을 보유한 일본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공해상에서 동북아시아 지역의 만사를 중재하게 될 경우’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조선통신사 일행이 닛코 도쇼구 참배를 강요받았듯이, 태평양 전쟁의 전범들을 신으로 모시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요청하는 그런 상황은 오지 않을까. 요즘 이 정권 사람들의 막가파 행태를 지켜보면 이런 터무니없는 악몽까지 떠오를 정도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우리은행, 기업대출에 급제동... 조병규 행장 “전략 변화에 사과드린다”
- “곧 상장·수익률 337%” 사기로 89억 챙긴 금융업체 대표 등 기소
- [단독] 김용 ‘구글 타임라인’, 돈 받았다 지목된 날 동선과 2㎞ 오류
- 통아저씨 가정사 고백… “친모, 시아버지 몹쓸 짓에 가출”
- ’허위 인터뷰 의혹’ 구속된 김만배, 법원에 보석 청구
- 롯데하이마트, 3분기 영업익 312억원 “5년 뒤 1000억원대 목표”
- 총선 불법 선거운동 혐의…박용철 강화군수, 첫 재판서 “선거운동은 아니다” 부인
- 평창서 사이드브레이크 풀린 레미콘에 치인 60대 숨져
- 규정속도보다 시속 80㎞이상 과속한 초과속 운전자 102명 적발
- [오늘의 운세] 11월 3일 일요일(음력 10월 3일 辛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