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문체부 장관의 찜찜한 취임사
누군가를 파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의 글을 읽는 것이다.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신임 장관이 지난 15일 취임사를 언론사에 배포했다. “문화강국으로 도약하자”며 이런저런 인용을 나열했다.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는 ‘한 나라의 성쇠강약은 병력이 아니라 문화의 힘에 달려 있다’는 믿음으로 규장각을 만들고”라는 대목에서 눈이 멈췄다.
황 장관의 주장은 규장각이 왕실 도서관 간판을 단 정치 기구였다는 점을 무시하고 있다. 정조는 규장각에서 문신들을 재교육하는 ‘초계문신’ 제도를 시행해 친위 세력을 육성했는데, 고위 관료가 된 이들이 임금에게 간언(諫言)은커녕 복종만 거듭하는 폐단이 발생했다. 오죽하면 규장각 초계문신 출신 다산 정약용이 “감히 낯을 들어 일을 논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하며 문득 임금의 사인(私人)이 돼버린다”고 비판했을 정도였다. 사실상 친문(親文) 집단으로 변질된 작금의 정부 부처를 돌아보게 한다.
황 장관 역시 대표적인 친문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문화·예술 관련 그 어떤 경력이나 전문성을 찾기 힘들지만, 한 나라의 문화 전반을 관장하는 부처 장관이 됐다. 학문적 논란(논문 표절 의혹)과 도덕적 해이(국회 본회의 때 스페인 가족 여행)와 금전적 문제(딸 외국 유학 비용 출처 등)까지 온갖 군데서 잡음이 불거졌지만, 대통령은 야당의 격렬한 반대에도 임명장과 꽃다발을 수여했다. 이런 장관이 정권의 입김에 휘둘리지 않고 충언(忠言)할 수 있을지 세간에 의구심이 팽배하다.
황 장관이 취임사에 언급한 ‘한 나라의 성쇠강약은 병력이 아니라 문화의 힘에 달려있다’는 말은 정조의 어록을 담은 일득록(日得錄)에서 빌려온 것이라 한다. 그러나 원문에는 ‘문화의 힘’이라는 단어가 없다. ‘盛衰強弱, 不在兵力, 而在國勢(성쇠강약 부재병력 이재국세)’의 ‘國勢’를 마음대로 ‘문화의 힘‘으로 해석한 것이기 때문이다. 방탄소년단·블랙핑크를 논하면서 이와는 한참 거리가 먼 정조를 굳이 의역까지 해가며 끌어들인 까닭이, 지난해 대통령이 추천 도서로 정조 관련 교양 서적을 꼽았기 때문은 아니길 바랄 뿐이다.
황 장관은 그러나 이 같은 찜찜한 취임사에 큰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혼자 쓴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체부 관계자는 “기획조정실 직원이 초안을 작성해 올려보냈다”고 말했다. 짧게나마 자기 문장으로 나름의 문화적 전망을 써내려갈 문화 부처 장관을 기대하는 건 시기상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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