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결과를 예측할 수 있게 된 법관 인사[오늘과 내일/정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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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직 한 가지 열정이 있다. 그것은 공정하게 재판하는 '좋은 법관(a good judge)'이 되는 것이다."
지난해 숨진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전 미국 연방대법관은 1993년 7월 상원의 인사청문회에서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묻는 한 상원의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긴즈버그 전 연방대법관은 나흘 동안의 청문회 일정 중 첫날 '암시하지 않고, 예측하지 않고, 예고하지 않는(No hint, No forecast, No preview)' 공정한 재판의 3가지 필수 원칙을 처음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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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성 등 '좋은 재판'의 필수 원칙 허물어져
지난해 숨진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전 미국 연방대법관은 1993년 7월 상원의 인사청문회에서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묻는 한 상원의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는 “법관은 공정하게 판결할 것이라고 선서한다”면서 “어떤 암시나 예측, 특정 사건에 대한 무관심을 공개해선 안 된다”고 설명했다. “그것이 (법관으로서의) 공정함과 독립성을 지키는 데 필수적이라고 믿는다”고도 했다.
긴즈버그 전 연방대법관은 나흘 동안의 청문회 일정 중 첫날 ‘암시하지 않고, 예측하지 않고, 예고하지 않는(No hint, No forecast, No preview)’ 공정한 재판의 3가지 필수 원칙을 처음 내세웠다. 그는 청문회 내내 낙태 등 민감한 이슈에 대한 질의에 60여 차례 답변을 회피했다. 이때부터 공직자 검증을 위한 청문회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법관은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질문에 노코멘트로 답변하는 것이 용인되는 전통이 생겼다. 이후 30년 가까이 수많은 연방대법관 후보자들은 청문회에서 “나는 ‘긴즈버그의 표준(The Ginsburg Standard)’을 따르겠다”는 답변을 하고 있다.
미국에서 ‘법관의 표준’으로 평가받는 긴즈버그 전 연방대법관을 떠올린 건 김명수 대법원장이 최근 단행한 법관 인사 때문이다. 2017년 9월 취임한 김 대법원장의 4번째 법관 정기 인사를 보면서 현직 법관들은 “어떤 판결을 하더라도 인사 불이익은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사라졌다”며 동요하고 있다. 한 전직 대법관은 “인사 원칙이 깨진 굉장히 이례적인 인사다. 심각해 보인다”고 했다.
무엇보다 재판 결과와 재판 진행 상황이 법관 인사에 반영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일선 판사들이 갖게 됐다는 점이 가장 심각한 문제다.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사건 재판을 1년째 공회전 중인 재판부는 인사 관례를 깨고 4년째 잔류했다. 반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를 법정 구속한 1심 재판부의 잔류 신청은 거절당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건에서 무죄 선고 전력이 있는 재판부는 인사 원칙대로 3년 만에 해체됐고, 정반대의 재판 성향을 보였던 재판부 판사 3명은 원칙의 예외를 각각 4∼6년씩 인정받았다.
대법원은 “사건의 규모와 재판 진행 상황, 인사 희망을 고려했다”고 하는데, 이 해명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까. 김 대법원장은 취임 초부터 ‘좋은 재판’을 강조했다. 좋은 재판의 본질은 재판의 공정성에서 찾아야 한다. 어느 당사자에게도 치우치지 않고, 특히 권력의 유무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누가 재판을 하더라도 똑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재판 불복이 줄어들고,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쌓일 수 있다. 그런데 전례 없는 법관 인사로 불행하게도 일부 사건의 재판 결과를 암시하고, 예측하고, 예고할 수 있게 됐다.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대법원이 국회에 계류 중인 이른바 ‘사법개혁입법’을 의식해서 인사를 단행한 것 아니냐는 의심마저 든다. 사법행정권 남용의 구조적 원인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법원행정처를 폐지하는 내용 등의 관련 법안은 국회 논의가 지지부진한데 김 대법원장의 임기는 2년 반밖에 남지 않았다. 국회의 과반 동의만 있다면 제도는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한다면 진정한 사법개혁은 불가능하다. 법관들과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후속 조치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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