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6년이 지났건만.. 닮은 사람만 봐도 움찔

김태성 기자 2021. 2. 17.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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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폭 피해자들, 트라우마 호소
"시간 지나도 나아지기는커녕 내 잘못인가 싶어 매일이 지옥"
“벌써 졸업한 지 6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하루에 두 번씩 공황장애 약을 먹어야만 버텨요.”

2015년 2월 졸업한 이모 씨(25)는 지금도 고교 시절을 떠올리면 온몸이 떨려온다. 처음엔 잘 어울렸던 친구들이 어느 날 갑자기 그를 상대로 ‘공기놀이’를 시작했다. 공기놀이란 집단따돌림(왕따)의 최악 단계를 일컫는 속어. 아무도 곁에 오지 않았고, 누구도 말을 걸지 않았다, 마치 투명인간처럼. 단지 “튀어서 같이 다니기 싫다”는 게 이유였다.

이 씨는 지금도 시내로 나갈 땐 몇 번씩 심호흡을 한다. 당시 가해자였던 ‘한때’ 친구를 마주칠까 봐 불안해서다. 얼핏 닮은 사람만 봐도 하루 종일 머리가 멍해진다. 이 씨는 “이젠 나도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화상 자국처럼 지울 수가 없다”며 “이번에 배구 선수들의 ‘학폭(학교폭력) 미투’를 보며 피해자들에게 공감되는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몇 년 전부터 이어져온 학폭 미투가 최근 프로배구 선수들에 대한 폭로를 계기로 다시 한번 거센 불길로 번지고 있다. 지금까진 연예인이나 프로선수 등 공인들이 주 대상이었지만, 최근엔 일반인 학폭에 대한 폭로도 쏟아지고 있다. 15, 16일에도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운동선수나 가수는 물론 현직 교육감의 자녀와 ○○항공 직원, 현직 경찰 등이 학폭을 저질렀다는 글들이 올라왔다.

아직 진실 여부는 가려지지 않았지만, 이들은 길게는 약 20년 전 기억도 끄집어냈다. 하지만 동아일보가 유사 경험을 가진 피해자들을 만나 보니, 이들은 “결코 때늦게 딴죽을 거는 게 아니다. 당한 사람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상처가 낫기는커녕 더 곪아터지고 있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그들은 현재의 폭로 러시를 “오랫동안 혼자 혹은 가족 등만 괴로워하다가 같은 처지인 누군가의 용기를 보고 힘을 얻어 펜을 드는 것”이라고 했다.

전문가들도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청소년기에 학폭을 겪으면 그 상흔이 평생을 갈 수 있다고 짚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학폭으로 인해 피해자는 무력과 모멸감, 수치심 등이 깊이 새겨져 성인이 돼서도 심리적 후유증을 안고 간다”며 “환자 사례를 살펴봐도 20년, 30년씩 정신적 장애를 앓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용기 얻었다” 일반인으로 번지는 ‘학폭 미투’

피해자들의 트라우마

일반인에 대한 학폭 폭로는 전방위로 이뤄지고 있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고교 2학년 때 따돌림을 당했다. 가해자는 ○○항공에 다닌다”며 신원 일부를 특정한 글이 올라왔다. “아버지가 현직 교육감인 가해자는 중학교 때 쉬는 시간마다 괴롭혔다”는 글도 16일 반향을 일으켰다. 또 다른 커뮤니티에선 “20년 전 괴롭혔던 가해자가 지금 서울의 한 경찰서에서 근무한다”는 폭로도 나왔다.

피해자들은 모두 학폭을 당한 뒤 학교가 감옥으로 변했다고 했다. 안에서도 고통받았지만, 벗어나도 마음에 ‘빨간 줄’이 그어진 건 오히려 피해자들이었다고 한다.

조만간 다니는 대학을 관둘 예정인 A 씨(19). 그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학교에서는 숨통이 막히기만 했다. 중학교 시절 학폭 때문이다.

어머니가 일본인이란 이유로 시작된 집단괴롭힘은 이후에도 줄곧 발목을 잡았다. 가해자들과 떨어진 고교에 가면 족쇄에서 벗어날 줄 알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다시 과거가 그를 옭아매며 학교에 앉아 있기만 해도 고통스러웠다. 결국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자퇴한 뒤 마음을 잡고 검정고시로 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학교는 여전히 학교였다.

“제가 문제인가 싶어 대인관계를 다룬 책들까지 읽어봤어요. 하지만 몸부림쳐도 바뀌는 건 없었죠. 내 잘못이 아니란 걸 받아들이는 데만 몇 년이 걸렸어요. 하지만 그새 전 ‘학교엔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 돼 버렸죠.”

초등학교 때 학폭을 당했던 대학생 김모 씨(22)는 지난해 학교에서 가장 원치 않았던 순간을 맞닥뜨렸다. 당시 가해자가 같은 과에 후배로 입학한 것이다. 10년 가까이 잊으려 애썼던 상처가 고스란히 터져 버렸다. 한동안 지원단체에서 상담을 받은 뒤에야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있다. 김 씨는 “다 지나서 왜 그러냐는 시선도 있다는 걸 안다. 그 고통을 겪어보지 않았다면 함부로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학폭 피해 자녀를 둔 한 학부모는 “당사자와 가족에게 자기 인생을 위해서라도 잊으라고 말해봤자 아무 소용 없다. 최근 학폭 미투처럼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고 가해자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 해야 그나마 마음을 연다”고 말했다.

김태성 kts5710@donga.com·김수현·이상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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