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요커 마인드]'설' 영어 이름 정하기

이채린 자유기고가 2021. 2. 17.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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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미국의 휴일은 각 민족, 또는 각 인종 간 힘겨루기의 결과다. 전통적 연말 인사인 ‘메리 크리스마스’가 ‘해피 홀리데이즈(Happy Holidays)’로 바뀌기까지는, 12월에 유대교와 아프리카의 휴일도 있는데 기독교의 성탄절만 언급하면 안 된다는 유대인과 흑인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미국 주식시장이 문을 닫는 날은 신년이나 크리스마스를 포함해 단 9일인데 그중 하나가 흑인 민권 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날(MLK day)’이다.

이채린 자유기고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날’이 중요한 휴일로 인정된 것은 물론 흑인들의 투쟁 결과다. 이탈리아인 중심인 ‘콜럼버스 데이’는 연방 공휴일인데도 주식시장은 쉬지 않는다. 미국의 중요 가치, 즉 포용성과 다양성이 표면적 이유지만 마냥 휴일을 늘릴 수는 없다보니 그 속내에는 보다 복잡한 권력투쟁이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주였던 설의 공식 영어명은 ‘루나 뉴 이어(Lunar New Year, 음력 새해)’다. 연방정부 휴일은 아니지만 2016년부터 뉴욕시의 학교 휴일로 공식화됐다. 공립학교 학생 여섯 명 중 한 명이 아시안인 뉴욕에서 ‘음력설’을 학교 휴일로 만들려는 법안은 2005년부터 시도되었지만 공화당인 블룸버그 시장 아래 아시안의 약한 영향력을 반영하듯 번번이 무산됐다. 민주당인 드 블라지오가 2013년 뉴욕시장으로 출마하며 내세운 공약 중 하나가 설날의 학교 공휴일 지정이었는데 막상 시장이 되고 나서는 무슬림의 두 축제일을 학교 휴일로 통과시켰을 뿐이었다. 실망한 아시안들은 시청 앞 시위를 벌이는 한편 각종 단체 및 기관들을 압박해 결국 음력설은 뉴욕 학교의 공휴일이 되었다.

이름을 정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숫자가 많고 미국 이민 역사가 오래된 중국인들은 ‘차이니즈 뉴 이어(Chinese New Year)’를 고집했고 한국인, 베트남인 등은 중국만 음력설을 쇠는 게 아니라며 반발했다. 결국 공식명칭은 포용성과 다양성을 고려해 ‘루나 뉴 이어’가 되었지만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노골적으로 ‘차이니즈 뉴 이어’라는 이름 아래 각종 행사를 후원한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한 중국 모델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루나 뉴 이어’를 축하한다고 썼다가 중국인들의 집중포화를 당하기도 했다. 뉴욕한인학부모협회는 ‘루나 뉴 이어’라고 부르자는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한때 한인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중국 상점이 즐비한 뉴욕 플러싱에서는 1991년부터 한국인과 중국인들이 함께 설 축제를 벌여왔는데, 1998년 어렵사리 ‘루나 뉴 이어 퍼레이드’를 축제 명칭으로 합의했다. 당시 대만 출신 이민자가 많아 가능했던 일인데 문화공정을 노골화하는 지금의 중국 분위기라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합의였을 것이다.

건강 간식으로 인기를 모으는 김을 미국에 가장 많이 수출하는 건 한국이지만 김의 영어명은 일본어인 ‘노리(Nori)’다. 최근 한국기업이 미국에 만두를 수출하며 ‘덤플링’ 대신 ‘만두(Mandu)’라 이름 지은 게 고마웠다.

휴일 지정도 명칭도 결국은 다 힘이고 외교다. 아시안으로 뭉쳐 권리를 찾은 후에는 다시 한국인과 중국인, 일본인 등으로 나뉘어 내 몫을 주장하며 경쟁할 수밖에. 너무 많은 것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채린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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